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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옥 시인 / 섬에서 섬으로 가다
시간의 언어, 달력의 언어를 실감하는 계절이다 태양에 몸을 맡기고 몇백 년 파도에 깎여 몽돌이 되었을까, 나그네들이 쌓아 올린 돌탑에도 일몰이 순간에 찾아든다 천년만년 말이 없는 굴업도는 바다 위에 누워 있다 일식, 월식을 반복하면서 썩어 들어간 상처의 웅덩이 해식와(海蝕窪), 몇천 년 밀려온 파도 자국일까, 파도는 쉼 없이 육지의 몸으로 몰려와 출렁거린다 내 안에, 섬 안에, 나를 가두고 유유자적 그냥 몸을 맡기자
스며들고, 흐르고, 어디로든 물은 흐른다 썰물이 시작되고 돌에 붙은 산더미 같은 골뱅이 숨을 몰아쉰다 지금도 바다에는 인어공주들이 얼마나 많은 물방울을 만들어내고 있을까
파종의 시간이 지나고 추수의 시간이 축제처럼 찾아오고, 추위가 엄습하는 시간이 스멀스멀 우리의 가슴을 파고든다 섬을 돌고 돌아온 서해의 바람은 모성의 바람인가, 밀물 속에서 낚싯대를 던지고 저 여인은 세월을 재촉하고 있다
이은옥 시인 / 간극
구 층 빌딩 창가 책상, 기왓장에 얹은 페타이어들을 세면서 공적 생활이 시작됐다 타이어 무게로 바람을 견디던 내수동 기와촌이 헐리고 경희궁의 아침 단지가 들어섰다 동아일보 청사가 리모델링하고 코리아나호텔 전광판에는 새로 바뀐 조선일보 로고가 빛났다 청계천이 흐르고 8도의 물을 합수하는 장면을 직접 보는 행운도 있었다 외교통상부와 정부종합청사 빌딩이 들어서고 간간이 공원에서 직원들과 한낮에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생기고 한국전기통신공사가 KT 간판을 내걸었다 서울역사는 KTX역으로 바뀌고 서울에서 평양을 거쳐 유럽까지 횡단한다는 대형 표지판은 어디로 사라졌다 퇴직하면 저 철마를 타고 국경을 넘어 시베리아를 지나 유럽으로 횡단하는 꿈을 꾸면서 적금을 부었다 김포공항에서 인천공항으로 옮겨 외국 출장을 갔고 월드컵 때는 야근을 하다가 직원들과 붉은 티셔츠를 입고 뛰쳐나가 광화문 사거리에서 거리 응원에 가담했다 오공을 지나 대통령이 몇 번 바뀌고 광장에서는 슬프고 아름다운 행사들이 이어지고 복원한 광화문 앞에 세종대왕 동상이 이순신 장군 뒤에 자리를 하고 신사임당이 오만원권 지폐의 인물이 되었다 서울시청을 새로 짓고 구시청은 도서관이 되었고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오픈되어 디자인서울이 강조되었다 그러는 사이 불혹은 구름 속에 숨어 버렸고 가족들은 이별을 하고 수신 없는 바람은 매일 밤 오장육부를 쑤셔댔다 어느 날, 칠십 대 노인이 숭례문에 불을 질렀다 국보 1호가 맥없이 허물어지는 장면이 뉴스에 보도됐다 그 이후, 김연아 선수가 대한민국에서 동게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벤쿠버에서 금메달을 걸고 피겨 여왕으로 등극했다 싸이가 강남스타일을 시청 광장에서 공연하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작은 차를 타고 백만여 명이 참가한 광화문광장에서 사복미사를 집전했다 광장에는 아직 노란 리본들이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고 있다 <꽃 피기 전 봄산처럼/꽃 핀 봄산처럼/누군가의 가슴 울렁여보았으면> 교보빌딩 걸개를 읽으면서 이백칠십여 권의 책 표지를 기억하며 이십이년을 청산하는 결재란에 선명하게 도장을 찍던 오후, 이세돌과 알파고가 세기의 대국을 펼친 포시즌호텔을 짓고 있을 때, 쓰다 남은 독도 고무지우개를 챙기고, 광화문역 1번 출구에서 구름을 타고 한강을 건너왔다
이은옥 시인 / 오랜만에, 아주 오랫동안
오래된 친구가 찾아왔다 황무지처럼 오래된 옷을 걸쳐 입고 지하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지하 식당에서 우리는 백반을 먹고 오래된 얘기들을 놓았다
아직도 투명성이 없는, 답도 없는 전투적인 얘기들을 나누며 지하에서 오래오래 검은 커피를 마셨다 친구의 일기에서 폭력은 사라지고 등잔불 같은 눈, 암전된다
신발 안에 가득한 먼지를 털며 마당 안에 세상인 고향에 사는 부친의 안부를 묻는다 이제 그곳에는 연어가 오지 않는다 아주 오래된 고가구 같은 친구 곁에서 오래된 먼 사람들의 얘기와 말들이 지상과 지하를 넘나들었다 일가친척들과 할아버지 할머니의 얼굴이 동해바다 해일처럼 일어섰다
봄, 이쯤에서 고향의 느티나무 순처럼 우리는 또 다시 도시의 불빛에 합류했다 십년 전의 옷을 걸쳐 입고 온 친구 곁에서 이십년 전쯤의 동막리를 생각했다
저 수족관 속 열대어들 눈부시다 더운 달 하나가 지하로 들어와 저녁을 흔든다
이은옥 시인 / 음화
그에게는 두 켤레의 구두가 있었다 수없이 바다 모래를 밟아 들인 구두만 문 앞에 있을 뿐이다 해풍이 심하면 갈매기들을 모아 집을 만들던 그는 두 켤레의 구두를 남기고 바다로 갔다 마당에는 조개껍데기 참게들이 그의 방을 기웃거린다 삶의 오두막에서 새가 된 사내에게 편지를 쓴다
(동굴에서 새를 낳아 키우고 몇 년간 일용할 양식을 잊지 않았지요 책갈피마다 묻어 있는 땀 냄새를 혀끝으로 맛보았지요)
사과 씨가 구두 안에서 살았다 구두 안에서 나무가 자랐다 나무 안에서 새가 알을 낳았다 새는 독 안으로 날아들었다
-시집 <나에게는 천 개의 서랍이 있다>에서
이은옥 시인 / 다시 섬강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메시지를 보내고 창을 닫는다 창 안에는 그들이 잠들어 있다 나는 줄곧 서신을 확신하고 그들의 얼굴을 닫는다 얼굴들이 점점 흐려진다 전보같은 메시지를 받고 달개비에 생수를 붓는다 그동안 시간은 무섭게 흐르고 무뎌지지 않는 감정만 치악산 아래버렸다 한줄기 아름 다운 친구들의 발걸음들 사이로 우울한 씨를 뿌리고 섬강을 건너왔다 삶은 우울한가 건재한가, 동물처럼 세포를 껴안는다 “우리 다시 섬 강에서 합류해”어린 날의 연서, 섬강에 풀었다
다시 많은 날들이 가고 나는 거리에서 짐을 풀고 있네
오후, 광화문으로 이동한다 나의 목적지는 어딘가로 사라지고 숙소로 가는 길을 지 하철에 발견한다 점점 쇠약해지는 말들, 엉겅퀴처럼 돋아난 혓바늘, 를 찍어 내리는 저 침묵, 저 저 보름달, 유년의 바다에서 헤엄치던 말미잘의 슬픈 몸을 본다 브라운관에 뜬 저 아 름다운 알들은, 언제 부화하여 물위로 떠오를 것인지
이은옥 시인 / 일상의 미학
자정, 지하철 신림역 청소부들이 고무호스를 들고 바닥 청소를 했다 사내는 신문지 한 장을 깔고 섬처럼 앉아 있다 지하, 계단에서 여자가 개를 세고 있다 여자는 팔리지 않은 개들의 목덜미를 잡아 상자 속에 넣었다 지상, 가로등 아래 남자가 토끼를 펼쳐 놓고 성경을 읽고 있다 머리통에서 검은 먹물이 흘러나왔다 어두운 골목길 전봇대처럼 평범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밤마다 사막의 선인장들이 도시로 공수되었다 묘지 위로 재즈는 어둠을 몰고 왔다 사내는 양손에 저울을 들고 다리를 건넜다 물속에 달이 빠졌다 물 위로 바람이 불었고 달빛은 바람에 날렸다 바람이 점점 심하게 나무를 잡고 흔들었다 나무가 뿌리째 뽑혀 하늘을 날았다 사내의 모자는 바람에 날려 구름 속으로 사라지고 고양이는 나무뿌리를 잡고 지붕에 떨어졌다 사람들은 개를 한 마리씩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은옥 시인 / 울렁거리는 것들 1
일렁이는 바람과 장마철 추녀 끝으로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빗방울, 소리를 내고 튀고, 땅에 떨어지고, 베일에 싸인 구름과 구름 한 점 없는 넓고 높은 하늘, 수평선에 바로 닿을 것 같은 예감으로 살아온 망망대해와 해안으로 밀려오는 낮은 파도, 천천히 흔들리는 나무들과 나무속을 파고드는 바람, 멀리 낙타 등 같은 산등성이 사이사이로 겨울이 지나갈 때,
빨랫줄에 널린 아버지의 눈부신 하얀 러닝셔츠가 햇빛에 말라 가는 소리, 할머니가 버스를 탈 때마다 주시던 쥬시후레쉬 껌, 생애 처음 입학하던 날 왼쪽 가슴에 손수건을 달아주던 예쁜 매화 고모, 목포행 배를 타고 흑산도를 떠나올 때 멀리멀리 점처럼 안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던 매자 고모, 하늘 아래 가족들과 형제자매들이 뿔뿔이 흩어져 영원히 잠든 거기를 지나올 때,
첫눈처럼 첫 글자와 이별을 의미하는 마지막이라는 글자
아름답고도 아름다운 연애 스토리와 키노트 스피치를 잘하는 연사와 상숙, 순이와 영자와 정연, 영숙이 미란이 금란이 종화와 선희, 미선, 국희와 영래, 영인, 명희와 성례, 성희, 정기, 매년 꽃피는 채송화처럼 오래오래 울렁거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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