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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향 시인 / 복숭아 한 알
허기가 지는 밤입니다 식탁은 달큰한 아픔이 후숙 되고 있습니다 알약을 삼키는 불 꺼진 속 버스 노선이 지하철 출구 같은 미래는 왜 이리 찾아내기가 벅찬지요 살을 파먹으며 벌레가 지나간 기척을 봅니다 단단한 씨방을 지나 캄캄절벽을 휘감아 걸어간 길 꿉꿉한 일생 창문 너머 먼 동 눈 감는 순간까지 골몰했던 길 아린 위장에 와서 길을 나고야만 길 이완과 수축 생의 내밀을 파먹으며 오래전 노트를 뒤적입니다 절벽을 넓혀 길을 내는 사람들 틈에서 단내를 풍깁니다 저녁이 버거운 사람들은 둥글게 몸을 말고 머리를 들이밉니다 복숭아 한 알 속을 걷다가 갇히기도 하겠지만 그렇다고 복숭아가 아니면 모두 복숭아나무입니다
신진향 시인 / 노안
가족이 가죽으로 바뀌어 읽히는 때가 왔다 어떤 저녁 모임이나 후의가 몸에 붙은 말로 바뀌는 때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늙은 짐승의 가죽 가방이 되었다는 게
나이 든 사람으로 간략히 지퍼를 닫는 행위가 된다는 것이 요긴한 치레의 관계성보다 더 빨리 납득시킬 말이 몸에 살았다니 모호하게 보이는 것과 더딘 저녁이 벗어놓고 간 초저녁잠에 잠깐 취했더니 새벽 오기가 한참이라서 적망的望을 쓴다고 해도 적막寂寞으로 읽을 것이라 원 없이 사랑했었다고 그런 때 있었다고 써 놓았다, 적막한 아침같이 뭉개지는 신문활자 일생 너를 속이고 나를 속여서
신진향 시인 / 눈 감으면 떠오르는 이름을 지우는 시간이 길 때 딴생각을 해
화촉 밝히는 밤이 온다 길을 지우고 어깨를 지우고 모래알 부서지는 사막
치골을 지우고 흔연히 떠오르는 손가락의 시간이 온다 남아 있는 것은 이름이 아니라 그날의 색깔 그날의 냄새, 얼굴보다 선명한 부재의 감각이다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냐는 얼굴이다 시선 속에는 닿지 못하는 이유가 숨어 있고 이해라는 말로 포장하는 동안 겹치는 눈빛은 작아진다 절반을 이해하기 위해 걷는 사막이 자라는 동안 욕심 내지 못하는 낙타의 혹 가지지 못한 깨어진 거울 한쪽 품는 동안 붉게 밝히는 화등
누구라도 좋으니 부재를 견디고 나서 핀 사막의 꽃을 들려주었으면 해 소문을 등지고 핀 꽃들의 후일담을 알려 주었으면 해
산다는 건 절반을 위해 접거나 펴는 일 접기 쉬운 화촉의 심지를 돋우는 일 사랑한다고 해서 매번 울 수는 없겠지만 내리는 무게가 없다고 해서 낙타와 꽃잎이 다를 리 없을 일 접은 날을 펴보고 침 뱉을 수 있겠지만 어쩌다 핀 꽃에 사막 같은 내 마음이 어둑한 별을 담아 오랫동안 서성거릴 일
돈도 뮛도 아닌 그것으로 오래 아플 일
당신의 눈꺼풀에 티가 붙는다면 눈물이 난다면
지난 생애와 이 생애를 털어 낙타 걸음으로 온 매일이 아팠던 사람이 닿았다 간 거라고 스위치를 켜는 거실에 문득 꽃이 될 일
어쩌면 우린 손끝 하나로 사막이었다, 별이었다, 짐승이었다, 가만히
가슴 반쪽 두드리는 바람을 먹고 체한 저녁 앞에 서성거린다
신진향 시인 / 와인
단맛은 신맛에 가깝고 신맛은 쓴맛에 친근하다, 오래된 유대는 잔에 담겨 속박되는 동안 휘발된다, 거짓말들이 다시는 잡히지 않을거라고 구름들이 뭉쳐서 떠드는 동안 버릴 수 있니 신발의 무게는 발을 지닌 채 몽유중이다 떠난다면 아침이 좋겠다, 흔적을 지우고 머릿속을 털어내고 물고기 한마리가 떠돌아다니는 내 두개골을 휘적이며 콩나물국을 먹다가 어제 먹은 치즈에선 귀두에 접힌 곰팡이 냄새가 났어 변명을 발견했다 혼자인 것들의 붉은 살 속에는 가지 않는 사람들의 말이 살고 끊었던 담배가 사흘에 한번 방문한다 핥거나 빠는 것은 사인과 모종의 관계 실종신고서를 작성하다가 어제 떠났다는 것을 알게됐다 해비속에는 지느러미가 있다 물고기가 도니 나는 수시로 유리벽앞에 몰두한다 외롭지 않니 즐겁게 쓴맛은 오래가고 단맛은 신맛과 친하다 오래된 유대는 나무들의 짠맛에 모두 흐트러진다 --<미래시학> 2022, 겨울호
신진향 시인 / 그 깟
명절 설거지 끝 물 한잔에 이십 년 산 정이 떨어지고 장롱 밑 둘둘 말아 건져낸 먼지 뭉치보다 가벼운 것들이 재활용 박스를 접다가 손이 베이고 떨어진 치마 단추 임시방편 옷핀에 찔려 피를 철철 흘리고 버려도 아쉬울 것 없는 미련 때문에 살았다 죽었다 밤을 새웠다 붙이고 흘려 넘긴 귓등으로 당신은 멀어지고 골목이 사라지고 다리가 무너지고 건물이 무너지고 개도 안 주워 먹는다는 것들이 싸웠다가 붙었다가 생각하면 참 질겨서 똥값 안 되려고 화장을 하고 꽃방석에 앉은 시늉 하고도 귓등 벌게서 시간 있어요 하던 어설픔 때문에 연애를 하고 어깨 두드려 주던 손 때문에 사이가 붙고 한 입만 먹어봐, 아 마주 벌린 입 때문에 세대가 늘고 세월을 붙이고 거리를 좁히고 빨간 인주나 찍는 그것들이 피를 철철 흘리면서 당신들의 목을 자르기도 하면서
신진향 시인 / 풍경
물이 설설 끓고 있었다 쥔 것을 놓아버리는 속은 넘칠 듯 출렁거렸고 어머니는 자신의 속 같은 암반에 밀가루 반죽을 뭉쳐서 한 마디씩 떼놓았다 불안하던 솥 안이 가라앉았다 말 한마디로 끓었다 가라앉는 건 혼자일 때 곧 넘칠 일이겠지만 위로란 한마디 말이 퍼져 뜨끈해진 눈시울에 있듯 몇 번의 손짓으로 한 상 차려낸 풍경일지 몰라 계절이 끓었다 사드라지는 일을 수차례 겪으면 나도 누군가에게 지난 경험들을 떼어 뜨끈해진 한 사발이 될 수 있을까 사흘 운 년이 열흘은 못 울까 그 말에 부끄러워 그친 울음이 차지고 매끈한 내일은 받들 수 있기를 수 없이 치대고 밟아야 하는 것을 계절이 먼저 알아서 마당의 맨드라미가 검게 씨를 익히고 있었다
-『김포신문/김부회의 시가 있는 아침』 2022.09.09
신진향 시인 / 콜라를 좋아하세요
콜라라고 쓰고 미련이라 읽죠 톡 쏘는 아픔, 와득 깨문 기억 관계의 종결어미는 그래요 씹거나 삼키거나 빈 잔을 남기면 리필되는 서툰 첫 키스의 기억같이 이가 부딪힌 콜라 콜라 콜라 하룻밤 같이 마실까요 뼈가 녹도록 단단한 밤, 라텍스 같은 매트리스는 늘어나죠 어두울수록 두꺼운 혀 따끔한 콜라를 미워하세요 나란한 미련을 눌러놓은 테이블 위로 씹지 않은 아픔이 있어요 같이 마실까요, 어제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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