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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소진 시인 / 인식의 나체 외 8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8.
박소진 시인 / 인식의 나체

박소진 시인 / 인식의 나체

 

 

완전한 공동체가 분열했다

 

멈춘 시간의 사후(死後) 어느 날

누가 와 수면의 문을 연 후(後)

 

궁금해졌다

스툴에 앉아 사이트 "F" 에서 이름을 찾기 시작한다 검색칸에

입력했다

 

나체로 명명된 이름

 

시간의 허공에 안착해 허상의

이름을 읽고 외로움의 결에서

목격하는 허무

 

알고 있지만

 

알 수 없는

우리의 나체

관계의 허공

 

그리고

영영

알지 못하는

 

 


 

 

박소진 시인 / 멍

 

 

샤워를 하다 문득

발등을 보았다

물 끝이 튀어 닿는 곳

검게 붉은 반점

 

눈앞을 간질이는 개미가

저기도 있네

예수 그리스도의 못 자국으로

죄를 품었는가

 

오늘의 무게만큼

십자가를 지어

거무스름한 두터운 눈물을 흘리고

지워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물을 걸걸히 쏟아부어

자국을 닦아 흐릿해지니

발등의 무게에 다리가 저렸다

죄의 무게에 멍을 새겼다

 

내가 만든 못 자국 새긴 자리에

물방울이 떨어져

쓰린 향유처럼 번지고

시린 연기에 비빈 눈으로

 

스스로 새긴 시퍼런 각인을

서글피 바라보면

무거운 훈장

갈 길 놓친 나 있네

 

 


 

 

박소진 시인 / 비를 보는 풍경의 진화

 

 

비는 그칠 생각이 없다

생성과 소멸의 공존

바깥 빗소리에 귀가 얼얼하다가

나뭇가지 움직임이

조금은 고요하다

닫힌 창틈 사이로

폭풍우가 으르렁댄다

 

경계에 닿아 부서지는 물방울은

제 삶을 끝내는 찰나

몸의 파편을 공중에 무겁게 뿌린다

잎사귀에 부딪히고

모래 틈으로 들어가고

누군가의 우산에 닿아

소멸의 소음을 탄다

 

그러다 내 창의 표면으로 왔구나

생을 조금이나마 붙들려

방울의 결정체로 유리를 붙잡고 있다

너는 곧 산산이 분해될 것이다

시멸의 종말에

 

곧 비가 그치고

해가 뜰 것이다

 

 


 

 

박소진 시인 / 섬 정류장

 

 

섬으로 들어오는 다리는 언제나 안개가 가득하다

개운하게 걷힌 날이 없다

시내 고속버스 터미널과 섬마을 비석 앞을 오고가는

버스는 고요하다

내리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별로 없다

 

좋은 약을 가져왔다 했다

꽤 좋은 물건이다

아픈 누이가 밥을 먹을 수 있다

집 나간 아들 때문에 말을 잃은 어미도 웃는다 한다

 

섬 다리 밑 물안개까지 헤치고 온 터라

누이와 어미를 살릴까 하여

육지 사람들이 만병에 좋다 하는 거라

동생 찾을 돈에 모아둔 돈을 탈탈 털어 몇 개를 샀다

 

우리에게도 꿈이 있었다

춤도 추고 노래도 할 꿈이었더랬다

희망만은 일그러트리지 말자고 했던 이야기였다.

우리들의 천국 속에서 살았다

 

육지에 다녀오면 받을 수 있다는 약은 아직도 오지 않는다

버스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다 오늘도 집으로 간다

여전히 내리는 사람도

오르려는 사람도 없다

 

 


 

 

박소진 시인 / 그네에 앉아 발을 구른 어느 모후

 

 

흰 새벽 옆집에서 플루트 소리가 흘러왔다

Over The Rainbow

여기 조금 넘어가는 거기

까만 가슴에 데워진 입김이 세차게 불어와

지금, 여기 누구도 없어

얘들아, 엄마가 불러

남겨진 발 구름에

멈추지 못한 그네에 내가 앉아 있다

어둑해졌다 순간이

나와 그네 사이에 쇳소리가 비릿하다

주변이 춥다

잡은 손잡이가

다리에 힘을 주어 공중을 향해 뻗는다

모래가 신발 끝 발가락에 튄다

 

몸의 대지에서 진동하는 그네의 추

조금씩 움직이는 다리 사이

따라오는 작은 다리

그 사이 떨어지는

Over The Rainbow

 

 


 

 

박소진 시인 / 정동길

 

 

첫서리가 사라졌다

눈빛마다 붉은 거품을 토하고

그녀의 발자국을 마주보고 굴렀다

내 발자국도 따라 울었다

초록 돌멩이끼리 짓이겨 껴안고

그 사이에 작은 틈이 생겨났다

새끼손가락 하나 들어갈 것 같은 세모난 고리 같다

거기에 내 심장을 껴 맞춰본다

 

걷는 외로움에

길 틈틈이 핏빛 그리움을 묻어 놨는데

가을이구나,

그녀의 낙엽이 하강하고

문득 끼워 넣은 심장이

잘 있나 궁금해져

다시 담들의 돌멩이로 갔다

퉁퉁 불어터진 고깃덩어리가

입이 달려

정신없이 뜀박질한다

 

어느새

차가운 낙엽 위로 하얀 발자국

 

 


 

 

박소진 시인 / 말(言)이 말하는 그곳에 머무는 말(言)들

 

​광장 이름은 mutti platz

빛나는 것들을 다시 볼 수 있는 유일한 성전 그렇지만 나는 관찰자가 아니다

오늘 mutti platz로 나왔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관찰자는 아니다 눈(目)이 좋을 뿐

 

(1일)

오늘은 사람이 있다

오늘은 빛에 속아 나온 사람들은 계단 위에 아무렇게나

앉아 있다

(2일)

오늘의 광장 바닥은 모난 돌이 부드럽게 박혀있다 여기 백 년 동안

서로 다른 발들은 똑같은 길을 걸었지만 같은 길은 아니다

누구는 원을 돌았다 누구는 뛰어 나갔다 그리고는 돌아오지 않았다

누구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있기만 했고, 누구는 자리를 펴고 자신의 물건들을 팔았다 누구는 싸움을 걸었고

누구는 결박당했다

(3일)

 

광장 밖의 나는 카메라 없는 사진사

돌바닥 위에 앉아 풀 속 넘어 안을 바라보는 중이다 지도에는 보이지 않는 mutti platz

오늘은 사람들이 많다

오늘도 햇빛에 속아 나온 사람들이 광장을 메웠다

(4일)

광장에 나가는 일을 그만 두었다 전염병이 돌았기 때문이다

서로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 집으로 갔다

나도 집으로 왔다

달력은 그동안 사백 번의 계절을 지냈다 나는 여전히 관찰자는 아니나,

그곳이 몹시 궁금해졌다 오랜만에 다시 mutti platz

(5일)

바닥은 오늘도 모난 돌을 품었다 누구는 원을 돌았다

누구는 뛰어 나갔다 그리고는 돌아오지 않았다

누구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있기만 했고 누구는 자리를 펴고 자신의 물건들을 팔았다 누구는 싸움을 걸었고

누구는 결박당했다

(6일)

그러나 거기에는 빛나는 순간이 있었고

보이지 않는 공간을 공유하는 시간도 빛이 났다

오늘 광장에 나온 사람들은

여전히 아무렇게나 앉아 있으나 더 이상 햇빛에 속지 않는다 정지한 영상이지만

여전히 움직이고

(7일)

어떤 속삭임이 자꾸 귀를 때린다 "오늘도 mutti platz 에서 만나요"

 

 


 

 

박소진 시인 / 해바라기 사자

 

 

꼬리 끝에 흑갈색의 털이 수북한 사자 한 마리

정글 숲을 홀로 걷는다 예리한 송곳니는 여전한데

화려한 시절이 가고 있다 입안에 적막이 고인다

무리가 사라진 숲 밤하늘의 별은 불면증이다

해바라기는 없고 해바라기는 있고 머리카락에

모래바람이 사각거리며 파고든다

메마른 땅을 디딘 맨발이 계절 밖으로 떠나간다

태양이 뜨지 않는 동쪽을 향해 해바라기를 심는다

상투적이 된 까만 해바라기 씨

해바라기 무늬를 다시 칠하고 정글 숲을 헤치고 달려나갈

사자를 제 몸에 묻어둔다

해를 바라보는 시간이 계속되는 동안 눈이 멀고 머리만 커지는

해바라기

시력을 잃어가는 중이다

가장 고요한 가슴에서 가슴으로 제 노래를 부르며

얼굴 가득히 노모를 새기며 침묵 하나를 방문하고 있다

​​

-2019년 발견 가을호 신인상

 

 


 

 

박소진 시인 / 바람을 부르는 소리

 

 

허공의 승무가 시작된다

바람결이 그네를 띄우면

구경 온 여인네 치마폭에

아들을 잃은 어머의 노래가 스민다

현을 뜯고 울음을 토하라

 

사냥하라

노루의 잘려진 발톱은

새총에 맞아서다

그녀의 쓸개를 피처럼 마시고

 

숲의 정령을 부르는 소리

붉은 영산홍을 몇 개 즈려

입술에 묻혀라

올빼미 부리처럼 날카롭게 뜯어라

 

뱀은 가라

제 둥지로 돌아가 똬리를 틀어라

네 놈의 성기 끝에서

땀을 마시고

생명을 내뿜고

 

 


 

박소진 시인

1983년 서울에서 출생. 연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재학 중. 2015년 《포엠포엠》에 <키노아이> 외 4편으로 등단. 시집 『사이, 시선의 간극』 세종도서 선정. 소설 『누구나 아는 라라』. 한양대학교 대학원 교육공학 전공. 교육 나눔터 뚜에듀(toutedu.com)를 운영. 자유문학세대예술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