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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허영숙 시인 / 이별에 관한 어떤 습관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8.
허영숙 시인 / 이별에 관한 어떤 습관

허영숙 시인 / 이별에 관한 어떤 습관

 

 

준비도 없이 사랑니는

어둑한 기슭, 저 안쪽에

아름답지만 불편한 이름으로 심어졌다

오래 그것을 혀로 핥았다

나의 일부가 되었으나

다른 뼈처럼 단단하게 뿌리내리지 못하고

가끔 통증이 되었다

앓다가 기어코 사랑니를 빼고 온 날 밤

세포들이 빈자리로 몰려갔다

뼈 하나를 잃은 남은 뼈들이 서로 뒤틀리고

잇몸은 억지로 정을 뗀 사람처럼 부어올랐다

몸에서 내가 버릴 수 있는

단 하나의 뼈가

가장 오래 나를 허물고 있다

안쪽에 남겨진 실밥을 혀로 핥아 본다

습관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허영숙 시인 / 나의 이웃

 

 

콩을 서 말 심으면

 

새가 한 말 먹고

쥐가 한 말 먹고

사람이 한말 먹는다는 노인의 말

 

그게 이웃이지

끄덕끄덕

 

땅 한 평 빌려 토마토며 오이를 심었더니

몰래 다녀가는 이웃이 늘었다

밤에는 밤대로

낮에는 낮대로

빈 주머니 차고 다녀가는 눈 밝은 이웃

 

하루 이틀

다 익기도 전 비어 가는 텃밭

낮밤이 근심이지만

울타리를 칠 수 없는 이유

나의 이웃들은 가끔씩

새끼들을 데려오기도 했다

 

 


 

 

허영숙 시인 / 우리는 너무 오래 서있거나 걸어왔다

 

 

오래 걷다 잡힌 발의 물집을 위로하자고

죽어서 누운 나무의 등뼈 한 가운데 앉는다

나무가 눕는다는 것은

생사의 금을 긋는 일

햇살과 바람의 간섭으로

틔우거나 피우거나 찬란하거나

보내거나 견디거나 하던 극복의 기록이

오히려 투쟁이었다는 듯

살아서 서 있다는 것이 형벌이었다는 듯

마른 수피 한 벌 입고 누워버린 나무는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골진 자리에 하얗게 피고 있는 독버섯

죽은 나무에 햇살 구멍을 만들어 분주히 들락거리는 개미들

아직도 파랗게 날 선 풀꽃군락을 지날 때도

그늘마저 물들이기 위해 골똘히는 느티나무를 지날 때도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길이 여기 있다

닫히는 중인 줄 알았는데 한 세계가 새로 열리고 있었다

다른 종들의 거처로 먹이로 다시 쪼개지고 쪼개지다 보면

마침내 흙

물집 잡혔다고 주저앉은 내 발도 마침내 흙

봄을 알리지도 못하고

언젠가는 봄을 보지도 못할 것 끼리 거룩하게 섞이고 섞여

다음 생이 목생이라면 오백 년을 산 나무의

일 년 생 잎으로 와서 함께 펄럭여 볼까

 

 


 

 

허영숙 시인 / 반얀나무

 

 

당신은 내게 가지로 자라길 원했으나

나는 기꺼이 뿌리가 되어 당신을 받들기로 한다

 

가지의 사원

수십 수천그루의 나무가 이루고 있는 반얀나무 숲

그러나 그건 멀리서 봤을 때의 이야기

가지가 뿌리가 되고 뿌리가 가지가 되는

오랜 숲의 역사에 대하여 말하자면

그 시작은 오직 한 그루

하나의 뿌리에서 오래고 긴 말의 매듭이 풀린다

맨 처음 시작이었던 큰 둥치가 무너지지 않도록

공중에 뿌리를 두고 아래로 가지를 내리는 나무

그 나무 죽은 자리는

어떤 식물도 자랄 수 없는 반얀나무

 

한 그루가 내린 사랑이 저토록 넓고 견고하다면

누구도 저 사랑에 대해 더 깊이 은유하지 못한다

 

수천 갈래의 가지를 내려 받치고 싶은

오직 한 그루, 당신

 

 


 

 

허영숙 시인 / 저물녘 억새밭에 가다

 

 

억새밭에 쪼그리고 앉으면

허공으로 난 빽빽한 길 위에 선 것 같다

세상의 모든 것이 지워지는 저물녘에는

무수한 저 길도 서러워져서 온 몸을 흔든다

잔광 속으로 하얗게 번지는 울음

흔들릴수록 울음은 더 멀리 번져나가서

저물녘을 예감한 모든 억새가

어둠을 머리끝까지 쓰고 운다

울음으로 들썩이는 들녘

시들어가는 볕에 서 본 적 없는

마디 푸른 것들은 다 듣지 못하는 저 소리

저물어 간 모든 것들은 갈피마다 울음을 품고 있다

저녁에는 사람이 낸 길도 저물어서

슬픔이 서리서리 얹힌 시절을 불러낸다

먼데서부터 빈 대궁을 채우며 오는 기억

 

그속에는 이제 그만 저물자는 당신의 말에

발목을 접질리며 돌아오던 저녁이 있다

대궁 속에 흥건하게 차오르던 울음을

이불 밑에서 하얗게 흘려보낸 시절이 있다

푸른 길이 아득히 저물어 갈 때

멀리 간만큼 되돌아와야 하는 길은 더 멀고 아파서

어둠은 사람의 발자국부터 천천히 지우며 온다

 

 


 

 

허영숙 시인 / 할미꽃

 

 

그늘 드는 마음 눌러보자고 나갔다가

너를 보았다

봉긋하게 내린 그림자를

환하게 바라보는 햇솜 같은 얼굴

누가 이 꽃을

그늘진 마음으로 보겠는가

누가 함부로 이마를 치켜들고

이 꽃을 보겠는가

 

 


 

 

허영숙 시인 / 놓고 오거나 놓고 가거나

 

 

언제부터 있었나 저 우산

산 적 없는 우산이 꽂혀 있다

비올 때 내게 왔다가 비 그치자 가버린 사람이 두고 간 것

오래 거기 있는 줄도 모르고,

 

나도 어디 놓고 온 우산은 없나

누가 펼쳐보고

내가 놓고 간 우산인지도 모르고

적셨다 말리며

적셨다 말리며 밥집으로 찻집으로 녹을 키우며 흘러가고 있을까

 

비올 때 간절하다 햇살 돌면 잊어버리는 사람처럼

 

살 부러져 주저앉을 때까지 손잡이 지문을 바꾸는

저 우산은

 

호적이 없다

 

 


 

허영숙(許英淑) 시인

1965년 경북 포항 출생. 부산여자대학 졸업. 2006년 《시안》으로 등단. 현재 〈시마을〉동인으로 활동 中. 시집 『바코드』 『뭉클한 구름』. 부산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