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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숙 시인 / 이별에 관한 어떤 습관
준비도 없이 사랑니는 어둑한 기슭, 저 안쪽에 아름답지만 불편한 이름으로 심어졌다 오래 그것을 혀로 핥았다 나의 일부가 되었으나 다른 뼈처럼 단단하게 뿌리내리지 못하고 가끔 통증이 되었다 앓다가 기어코 사랑니를 빼고 온 날 밤 세포들이 빈자리로 몰려갔다 뼈 하나를 잃은 남은 뼈들이 서로 뒤틀리고 잇몸은 억지로 정을 뗀 사람처럼 부어올랐다 몸에서 내가 버릴 수 있는 단 하나의 뼈가 가장 오래 나를 허물고 있다 안쪽에 남겨진 실밥을 혀로 핥아 본다 습관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허영숙 시인 / 나의 이웃
콩을 서 말 심으면
새가 한 말 먹고 쥐가 한 말 먹고 사람이 한말 먹는다는 노인의 말
그게 이웃이지 끄덕끄덕
땅 한 평 빌려 토마토며 오이를 심었더니 몰래 다녀가는 이웃이 늘었다 밤에는 밤대로 낮에는 낮대로 빈 주머니 차고 다녀가는 눈 밝은 이웃
하루 이틀 다 익기도 전 비어 가는 텃밭 낮밤이 근심이지만 울타리를 칠 수 없는 이유 나의 이웃들은 가끔씩 새끼들을 데려오기도 했다
허영숙 시인 / 우리는 너무 오래 서있거나 걸어왔다
오래 걷다 잡힌 발의 물집을 위로하자고 죽어서 누운 나무의 등뼈 한 가운데 앉는다 나무가 눕는다는 것은 생사의 금을 긋는 일 햇살과 바람의 간섭으로 틔우거나 피우거나 찬란하거나 보내거나 견디거나 하던 극복의 기록이 오히려 투쟁이었다는 듯 살아서 서 있다는 것이 형벌이었다는 듯 마른 수피 한 벌 입고 누워버린 나무는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골진 자리에 하얗게 피고 있는 독버섯 죽은 나무에 햇살 구멍을 만들어 분주히 들락거리는 개미들 아직도 파랗게 날 선 풀꽃군락을 지날 때도 그늘마저 물들이기 위해 골똘히는 느티나무를 지날 때도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길이 여기 있다 닫히는 중인 줄 알았는데 한 세계가 새로 열리고 있었다 다른 종들의 거처로 먹이로 다시 쪼개지고 쪼개지다 보면 마침내 흙 물집 잡혔다고 주저앉은 내 발도 마침내 흙 봄을 알리지도 못하고 언젠가는 봄을 보지도 못할 것 끼리 거룩하게 섞이고 섞여 다음 생이 목생이라면 오백 년을 산 나무의 일 년 생 잎으로 와서 함께 펄럭여 볼까
허영숙 시인 / 반얀나무
당신은 내게 가지로 자라길 원했으나 나는 기꺼이 뿌리가 되어 당신을 받들기로 한다
가지의 사원 수십 수천그루의 나무가 이루고 있는 반얀나무 숲 그러나 그건 멀리서 봤을 때의 이야기 가지가 뿌리가 되고 뿌리가 가지가 되는 오랜 숲의 역사에 대하여 말하자면 그 시작은 오직 한 그루 하나의 뿌리에서 오래고 긴 말의 매듭이 풀린다 맨 처음 시작이었던 큰 둥치가 무너지지 않도록 공중에 뿌리를 두고 아래로 가지를 내리는 나무 그 나무 죽은 자리는 어떤 식물도 자랄 수 없는 반얀나무
한 그루가 내린 사랑이 저토록 넓고 견고하다면 누구도 저 사랑에 대해 더 깊이 은유하지 못한다
수천 갈래의 가지를 내려 받치고 싶은 오직 한 그루, 당신
허영숙 시인 / 저물녘 억새밭에 가다
억새밭에 쪼그리고 앉으면 허공으로 난 빽빽한 길 위에 선 것 같다 세상의 모든 것이 지워지는 저물녘에는 무수한 저 길도 서러워져서 온 몸을 흔든다 잔광 속으로 하얗게 번지는 울음 흔들릴수록 울음은 더 멀리 번져나가서 저물녘을 예감한 모든 억새가 어둠을 머리끝까지 쓰고 운다 울음으로 들썩이는 들녘 시들어가는 볕에 서 본 적 없는 마디 푸른 것들은 다 듣지 못하는 저 소리 저물어 간 모든 것들은 갈피마다 울음을 품고 있다 저녁에는 사람이 낸 길도 저물어서 슬픔이 서리서리 얹힌 시절을 불러낸다 먼데서부터 빈 대궁을 채우며 오는 기억
그속에는 이제 그만 저물자는 당신의 말에 발목을 접질리며 돌아오던 저녁이 있다 대궁 속에 흥건하게 차오르던 울음을 이불 밑에서 하얗게 흘려보낸 시절이 있다 푸른 길이 아득히 저물어 갈 때 멀리 간만큼 되돌아와야 하는 길은 더 멀고 아파서 어둠은 사람의 발자국부터 천천히 지우며 온다
허영숙 시인 / 할미꽃
그늘 드는 마음 눌러보자고 나갔다가 너를 보았다 봉긋하게 내린 그림자를 환하게 바라보는 햇솜 같은 얼굴 누가 이 꽃을 그늘진 마음으로 보겠는가 누가 함부로 이마를 치켜들고 이 꽃을 보겠는가
허영숙 시인 / 놓고 오거나 놓고 가거나
언제부터 있었나 저 우산 산 적 없는 우산이 꽂혀 있다 비올 때 내게 왔다가 비 그치자 가버린 사람이 두고 간 것 오래 거기 있는 줄도 모르고,
나도 어디 놓고 온 우산은 없나 누가 펼쳐보고 내가 놓고 간 우산인지도 모르고 적셨다 말리며 적셨다 말리며 밥집으로 찻집으로 녹을 키우며 흘러가고 있을까
비올 때 간절하다 햇살 돌면 잊어버리는 사람처럼
살 부러져 주저앉을 때까지 손잡이 지문을 바꾸는 저 우산은
호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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