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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주선미 시인 / 소금빵의 비밀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8.
주선미 시인 / 소금빵의 비밀

주선미 시인 / 소금빵의 비밀

 

 

서해의 섬 지나 해안으로 밀려온 너는

바람아래 갯벌 온몸으로 품었다

 

파도를 넘어

완강한 프레임에 너를 가둔 것을

운명이라고 하자

 

바람이 바람을 만들고

땀은 땀을 만들었다

 

정* 안으로 쏟아지는 정오

피할 수 없으므로

정면으로 맞섰다

 

온몸으로 부딪다 생긴

상처 딛고,

가장 낮은 바닥 이기고

핀 너는

 

초승달을 버린 것도

해안선을 뭉갠 것도

정해진 길이었다는 생의 결정체

 

콕콕 박힌 소금꽃

입 안으로 퍼지고 있다

 

*염전을 칸으로 나눈 소금을 만드는 방

 

 


 

 

주선미 시인 / 너에게 가는 길

꼬마물떼새 알락할미새 도요새 흑고니

안면도 가는 AB지구 하늘이 정체 중이다

 

회오리바람이 뒤적이는 물결 위로 마른 잎 떨어진다

안으로도, 밖으로도 나가지도 못하고

흘러가지도 못하고

 

빈 나뭇가지 끝에 닿아 물결 일군다

그것도 그늘이라고 서늘하다

 

젖은 잎 몇 장 마른 길섶에 얹어 놓았다

젖은 몸 말리면 생각도 마를까

 

얼마를 떠돌았는지 모른다

 

도시를 산다는 것은 낯선 계곡을 지나는 물과 같아서

낙하지점을 가늠할 수 없고

 

정착할 둥지를 짓겠다고

천지사방 헤매고 다녔는데

 

마른 자갈 발길에 채이는 어둠 자욱한 초저녁이 몰려온다

이 길 끝까지 가면 기다림 하나 서성이고 있을까

-웹진 『시인광장』 2024년 8월호 발표​​​​​​​​​

 


 

 

주선미 시인 / 맛있는 시

-옥종 시인에게

 

 

잡채를 읽기 시작하는데

꿈벅거리는 눈빛이 보인다

 

오늘은 또 얼마큼의 막걸리로

하루를 지탱했을까

 

붉어진 취기로 밤새

써 내려갔을 문장들

 

종일토록 함께 지낸 물성들은 오늘

얼마나 부화한 것인가

 

미각으로 꾹꾹 누르고

맨손으로 다독이며 차린 진수성찬

맛없는 것들이 없다

 

저만치 놀래미 한 마리

퍼더덕 퍼더덕 별빛을 친다

 

-시집 『지도에 없는 방』, 시와문화, 2022년

 

 


 

 

주선미 시인 / 피아골 미선씨

 

 

단풍이 오지게 번지는 마을

연곡사, 차갑게 찰랑거리는 풍경 소리

깊이 들어앉은 계곡

 

산이 깊어 벼 한 포기 심을 데 없는 땅

버려지는 피를 심어

피맛골이라 이름 붙여진 골짜기

 

형제끼리 총부리를 겨눠야 했던

육이오의 마지막 피로 얼룩진 골짜기였으나

전쟁의 소용돌이도 허물지 못했던 피아골 단풍

아이엠에프의 묵직한 망치가

산산이 부숴버렸다고 한다

등 돌린 골짜기처럼 쩍쩍 갈라놓았다고 했다

 

그래, 한 번쯤은 죽을 수 있었다고 하자

실컷 벌어진 벚꽃과 봄 사이에서

서성거리던 미선씨,

스물의 화려한 도시

피아골 접접한 계속 속으로 접어 넣었다

 

IMF라는 그늘을 모두 걷어내고

칭칭 감겨오는 거미줄 풀어냈더니

코로나19라는 또 다른 결박이 보인다

 

빈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떠돌고 있는 피아골의 봄,

저 높은 파도 어떻게 또 넘느냐고

피아골 지키던 사람들 돌아선 봄날

 

미선씨,

도토리로 빚은 묵밥을 만다

천왕봉 오가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찻잔을 안긴다

 

가장 가난했던 집, 피아골

만발한 벚꽃처럼

어제의 밤이 지나고

오늘이란 햇살이 수북하게 쌓인다

 

피아골, 미선씨 활기찬 발걸음

벚꽃잎으로 펄펄 날아다닌다

 

 


 

 

주선미 시인 / 수족관 오피스텔

 

 

23층 창문에서 보이는 것은

수평선 팽팽하게 그어진 천수만이 아니다

아침 햇살 높은 지붕부터 휘감아 올리는

도시의 숲이다

 

제 앞만 비추는 신호등 끊겨

군데군데 상처 난 길

오늘이 풀어놓은 차들 꽉 들어차

옆구리로 빠질 수도 없다

 

탄소 중독으로 숨 한번 쉴 수 없는

수족관 속 물고기들

제집 버리고

일제히 허공으로 입 내밀고 있다

 

나는 한 마리 물고기

 

지느러미 흔들어 도착한 곳

도시 불빛들이 둘러싸 안은 시멘트 블록 수족관

손에 잡힌 것은 신기루

 

오직 꼭대기로,

꼭대기로 오르면

새 세상이 보일 것 같아

롤러코스터를 탄다

 

머리는 바다를 떠도는데

몸은 낭떠러지로 떨어져 내린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여전히 신기루만 보이는 수족관

 

사랑할 용기는 숨겨져 있고

롤러코스터 끝에 다다를수록

욕망은 더욱 커져간다

출구 없는 욕망의 꼭대기를 딛고

더 높은 허공으로 올라간다

내려디딜 수 없는…

 

 


 

 

주선미 시인 / 밤 열두 시 라면을 끓이는 이유

 

 

먹을 것을 찾다가

라면을 끓였다

간단히 꾸린 살림이라 김치도 없고

아침에 끼적거리다 말았던

김치찌개 냄비째 상에 올려놓았다

냉장고 문을 열어

차가운 곳에 유폐시켰던 밥 한 덩이 꺼냈다

 

며칠째 모른 척했다고

삐친 애인처럼 독이 올라 곤두서 있다

뜨거운 라면에

다독다독 풀어 밥 한술 뜨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주인이 실종된 번지에

뿌리 없는 언어들

검푸른 형용사로 자라났으나

마음에 두지 않았다

 

조금만 더 힘내자고,

쓰러지지 말자고,

서로 등 기대고 스크럼을 짰다

무엇을 이룬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

 

모두 내려놓고 빈 마음으로 돌아섰다

그런데, 어디서 놓지마라 한다

욕심을 채우라 독촉한다

내 배후에 누군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시와사람》 2022년 가을호

 

 


 

 

주선미 시인 / 이별의 방식

 

수건으로 물기를 닦는 데 울컥한다

수건 틈 사이로 쏟아지는 기억들

얼마나 시간이 흘리야 지워질까

온전히 나만 보아야만

온전히 너만 보아야만

하나가 되는 줄 알았다

엎드릴수록 차가워지는 당신의 등 뒤로

12월 바람이 밤새 분다

형체를 잃은 사랑도 사랑이라고

순간순간이 너였으므로

바람 소리에 철렁 내려앉는 심장이라니

어긋난 시선은 어긋났으나

수평을 맞출 수 없었던 것은

당신의 일

-계간 『시와산문』 (2023년 가을호)

 

 


 

 

주선미 시인 / 집 떠나온 발걸음

 

 

집 떠나온 발걸음

땅속으로 끝없이 내려가고 있다

푹 꺼져 바닥끝까지 닿아보려는 듯

계속 내려가고 있다

철로 위를 허정대는

지하철의 불빛

보이지 않는 길이 막막한 걸까

지하철 문이 열리고 사람들

꼬물꼬물 쏟아지고 있다

총총히 저녁 밟고 가는 사람들

멈추어서지 않는다는 것은

목적지가 분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목적지가 사라진,

새로울 게 없는 지루한 삶도

갈아탈 수 있을까

사는 것이 힘들어 때로는

숨을 멈추고 싶을 때

환승역에서 갈아타고

다른 역으로 가면 안 되는 걸까

 

 


 

​주선미 시인

충남 태안 출생. 2004년 『홍주문학』, 2017년《시와 문화》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안면도 가는 길』 『일몰, 와온 바다에서』 『통증의 발원』 『지도에 없는 방』 『플라스틱 여자』. 《시와 문화》 2019 젊은 시인상, 충남문화재단창작기금 수혜. 현)《시와문화》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