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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옥 시인(서울) / 부음을 듣는 저녁
사람들이 떠난다 모든 것은 떠나게 마련이지 되뇌는 동안에도 또 다른 부음이 들려오는 저녁
떠난 사람의 번호가 그대로 저장되고 생전에 그가 올린 글을 읽기도 하면서 사이버 공간에 남아 있는 그가 여전히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메모리 용량이 초과되는 세상 삭제해도 다시 복제되는 그를 만난다 떠나고 남는 잔영 어느 날 그도 나도 갑자기 떠나면 다시 남아 부유하는 누군가의 문가에 점등되는 흐린 불빛을 걸어 두겠지.
김용옥 시인(서울) / 가을 점등(點燈) 이제 지상보다 그리운 이름 천상에 가득하다 길 가다 만난 서늘한 저녁답 속에 기울어진 어깨를 감싸 안아주는 이도 한기에 눈 뜬 신새벽 뒤척임을 여며주는 이도 없어 빈집에 고인 적요에 뼈들이 삭아 내린다 처서 지난 이른 가을날 지상에서 지워진 얼굴들 차가운 정수리에 일제히 불을 밝혀 그렁대는 울음을 쓸어주며 문득 환해지는 온수리 마른 들판 살별 가득 내려와 어둠을 내몰고 물기 가득한 흐린 등잔을 내다건다
김용옥 시인(서울) / 따뜻한 진창의 기억 추석 앞둔 미술관 열한 시 소녀가 혼자 그림 앞에 서 있다 진창을 건너본 적 없는 가는 흰 손목 그때에도 미술관이 있었더라면 온몸에 청보라 물감을 묻히고 어둑한 실기실을 밀고 나가 열리지 않던 시간의 문고리를 열었더라면 오수 넘치는 뒷골목을 싸돌아다니느라 비루해진 몸 참을 수 없는 악취에 길들여진 따뜻한 진창의 기억 더는 되돌아설 수 없는 나락 너머의 흰 발목 거친 광목천을 가득 채운 차콜로 채색한 선 위에서 아직도 위태로운 서녘이 기울고 있다
김용옥 시인(서울) / 색깔 찾기
나이에 맞는 색깔을 드러내야 한다고요
늘 흐린 색깔 뒤로 몸을 숨기고 안에서 튕겨 나오는 빨강, 노랑, 초록 일테면 원색은 촌스럽다고 자꾸 체도를 흐려버렸지요
보호색에 길들여진 오랜 시간 색깔을 찾아가라는 한 마디 말이 상처가 되어 칭얼대는 내 온몸에 누가 걸맞는 빛깔의 명패 좀 달아주세요
김용옥 시인(서울) / 느닷없는 사무침으로
사무치던 날들 그리워 자주 가던 명동 대한 음악사 부근 비가 내린다.
유리창에 비친 흥청거리며 가는 인파 속에 더러 그늘진 사람도 있다.
술에 취한 남자의 긴 통화와 서로에게 어깨를 내준 연인들 사이에서 오래전의 오이도烏耳島에 내리고 싶어진다.
밤 열시를 지나 명동을 떠난 전철이 오이도에 닿을 즈음 뭉텅뭉텅 각혈을 쏟듯 까마귀 울음이 사무치리라고
이제는 허물어져 버린 간이역 이름처럼 느닷없이 사무쳐오는 울먹임으로 지워진 거리 밖에 눅눅해진 내가 있다.
김용옥 시인(서울) / 한눈파느라
전 생애가 비틀렸다 어느 귀퉁이에서 이정표를 읽지 않고 지나쳤나 빈 길 위에서 누군가 내민 손을 뿌리쳤나 아니다, 아니다 길섶 풀꽃의 흔들리는 눈짓을 놓친 게다 아니다. 구름이 흘러가다 멈추는 발길을 못 본 게다.
아니다 뒤에서 붙드는 바람 소리에 자꾸 한눈팔고 기웃대느라 모로 기울어진 어깨로 절뚝거리며 아직도 추운 그늘로만 가고 있는 게다.
김용옥 시인(서울) / 오후 서너 시경에 무심히
사람들이 빗속에 길을 간다. 이 비 그치면 기온이 내려가고 풀들이 마르리라. 가파른 시간이 저물 때마다 찾아가 걷던 여의도 샛강 둔치에도 이제 곧 인적이 드물어질 것이다. 자전거 도로를 따라 하염없이 앞으로 달려가던 한 무리의 사람들마저 어딘가에 머물며 자기 방식의 긴 겨울을 날 것이다. 점점 차가워지는 강바람 속에 이제 머리카락을 말리며 좀 쉬어가리라. 몇 굽이의 큰 물살이 저마다의 흔적을 남기고 빠져나간 서늘한 물가에서, 놓치고 지나온 것들이 잔 물살로 헤살 짓는 낮은 소리에 헌 발을 내려놓고 일렁이는 그늘을 오후 서너 시경 무심히 지켜보리라. 그냥 그러한 스쳐감으로 나 또한 그늘의 일부가 되어 바라보리라, 그리고 멀리 떠난 길 위에서 서성이며 더디게 찾아오는 시를 다시 맞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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