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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용옥 시인(익산) / 잃어버린 곡선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8.
김용옥 시인(익산) / 잃어버린 곡선

김용옥 시인(익산) / 잃어버린 곡선

 

 

진종일 빗발과 괴로움 사이에서

바람이 회오라치며 울고 있다

 

고도로 발달한 문명의 직선에 갇혀

자연의 곡선을 그리워하는 나는,

베란다의 유리창 너머 반달을

눈동자에 담아, 그의 눈을 향해 돌아섰다

그는 내 눈 속에 막힌 달을 결코 조지 못 했 다

 

나는 온몸으로 외로웠다.

 

 


 

 

김용옥 시인(익산) / 말

 

 

오래된 말에 매달려 산다

거짓된 말에 시달려 산다

 

과거에 말이 있었고

그 말이 현재의 우리를 지배할 동안

우리의 입술에서

성충 나방처럼 팔랑팔랑 쏟아지는

언어의 하루 또는 하루의 언어

 

아무리 쏟아버려도 줄지 않는 언어로도

아무리 퍼 담아도 넘치지 않는 언어로도

어둡고 무거운 生의 찢어진 장막을

촘촘히 깁지 못한다

교미하지 못한 언어의 나방이

우수수우수수 떨어져버린다

 

창공까지 훨훨 날아가는

언어를, 누가 보았는가?

 

-시집 『새들은 제 이름을 모른다』에서

 

 


 

 

김용옥 시인((익산) / 백설의 벌판에 홀로 서라

 

 

백설의 벌판에 홀로 서라.

세계의 낯선 곳에서 길을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 된다.

길인 듯 길이 아닌 곳에 선,

잘 아는데도 뚫고 갈 방향을 찾지 못하고

뱅뱅이질 하는 그 두려움과 낯설음.

사실은 내 삶이 혹은 우리의 삶이 그렇게 진행되어 온 것이다.

겁나는 세상, 늘 낯설은 사람들.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살고 싶어한 게 아니라,

세상이 나에게 이렇게 살 수밖에 없게 했다.

 

지상에 눈이 두터워지면

더 이상 먹이를 찾을 수 없는 노루 한 마리.

드문드문 저녁연기 피워 올리는 인가가 있는 들판으로

겁먹은 채 내려오는 노루 한 마리.

허기지고 지쳐 아니 오직 목숨줄인 먹이를 위해, 살고 싶어,

죽음을 겁내면서 막막하게 설원을 걸어온 노루 한 마리.

그 노루가 나였다.

먹장 같은 죽음의 커다란 아가리가

나를 덥썩 삼킬까 봐 염불처럼 외워댔다.

살고 싶어, 살아야 해, 살아 남아야 해.

 

인생의 맛은 참 지랄 같았다.

달콤새콤하거나 다달보드레한 어린 시절은 잠깐,

헛물켜게 들쩍지근하거나 시큼떨떠름해졌지.

지금에야 물론 무맛의 신선함과 담백함을 알 만하지만

인생은 아직도 타분하거나 짐짐하다.

 

솜사탕처럼 눈을 한 움큼 퍼서 먹는다.

개운하고 시원하다.

한 움큼 퍼서 머리 위로 던진다.

면사포가 아니라 하이얀 고풀이 띠다.

활개치며 눈사진도 찍고

얼굴을 깊이 눈 속에 묻어 마스크도 찍어낸다.

그 위로 눈발이 쌓여 희미해진다.

그렇게 나는 사라져 갈 것이다 흔적도 없이.

그래도 나는 포근하다.

눈밭에 서서. 꼭꼭 처닫은 마음을 열어 주니까.

가벼워지니까. 작아지니까. 비워지니까.

 

설경에는 아름다운 시학(詩學),

깊은 미학(美學)이 있다.

 

 


 

 

김용옥 시인(익산) / 백화百花를 말려

 

 

 제비꽃 장다리꽃 민들레꽃 자주괴불주머니꽃 토끼풀꽃 진달래꽃 왕벚꽃 골담초꽃 가막살나무꽃 쇠물푸레꽃 이팝꽃 조록싸리꽃 말발도리꽃 때죽나무꽃 찔레꽃 벌깨덩쿨꽃 석창포화 넝쿨장미화 긴기아남꽃 석곡화 민귀화 창포꽃 감꽃 인동꽃 씀바귀꽃 애기똥풀꽃 접시꽃 자란화 아기나리꽃 꿀풀꽃 양귀비꽃 붉은토끼풀꽃 오공국화 다래꽃 초롱꽃 노랑매말톱꽃 약모밀꽃 대문자초꽃 수레국화 엉겅퀴꽃 석죽화 풀협죽도화 마삭줄꽃 백등화 붉은찔레꽃 철쭉꽃 대엽풍란화 석류화 견우화 달맞이꽃 낮달맞이꽃 금계국화 나리꽃 치자꽃 왕쥐똥나무꽃 벌노랑이꽃 비비추꽃 장미화 까치수영꽃 산수국꽃 해당화 배롱나무꽃 참깨꽃 분꽃 옥잠화 맨드라미꽃 할미밀빵꽃 좀나팔꽃 백목련화 박주가리꽃 모감주꽃 돼지감자꽃 패랭이꽃 매화 페추니아꽃 오이꽃 싸리꽃 잇꽃 닭의장풀꽃 봉숭아꽃 과꽃 부처꽃 벌개미취꽃 소엽맥문동꽃 쑥부쟁이꽃 배초향 참취꽃 꽃무릇꽃 새콩꽃 소국화 분홍바늘꽃 기생초꽃 수국꽃 원추천인국꽃 개망초꽃 박하꽃 상사화 맨드라미꽃 이팝나무꽃 백련화

 

 


 

 

김용옥 시인(익산) / 은행 떨어지는 소리

 

 

 은행을 줍는다. 바람 한 점 지나가는 기척도 없는데 토옥, 토옥 간간이 은행알이 대지를 두드린다.

 ‘대지여, 나를 품어 주오. 흙의 소산을 먹고 내가 살았으니 이제 흙이 되려 하오.’ 이 땅 위에 난 것마다 땅으로 돌아가는 늦가을이다.

 은행을 주우면서 꽃의 집을 생각했다. 꽃의 집은 생명의 집이고 곧 씨 주머니다. 모든 식물의 절정은 꽃. 식물은 꽃을 피워 사랑을 실현하고 그 사랑을 유전 존속시키기 위해 씨를 맺는다. 씨는 아름다운 꽃의 유전자.

 솔방울 비늘 속의 솔씨를 생각하고 바늘 끝만 한 채송화 씨를 생각했다. 가을들판의 볍씨와 대추씨를 생각했다. 나는 참으로 많은 씨의 자양을 먹고 살았다.

 아름다운 꽃의 혼을 먹고 살아온 사람은 아름다운가? 그런 나는, 지금, 어떤 씨를 맺고 있나?

 대지로 돌아갈 때가 멀지 않다. 이 한 알의 은행알처럼 잘 여물어, 스스로 돌아갈 때를 알아서, 한순간에 서슴없이 대지의 품으로 돌아간다면 정말 좋겠다.

 토옥, 탐욕이 떨어지는 소리다. 토옥, 분노가 떨어지는 소리다. 토옥, 어리석음이 떨어지는 소리다.

 

 


 

 

김용옥 시인(익산) / 자유인

 

 

 어머니는 무엇을 설명할 때, 또 잘못을 빌거나 용서를 구할 때도 말을 길게 늘어놓는 걸 삼가라 했다.

 

 “짧게 말해라. 장황하게 늘어놓으면 오히려 진의를 놓칠 수 있거든.”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과 상대하지 말어. 벙어리하고 다투지 말라고 했거든. 답답한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은 화를 내거든.”

 

 명징한 단어 몇 개면 의사 표현에 족하다. 중언부언 변명이나 요설은 사람을 구차스럽게 한다. 덜 익은 사람일수록 말이 많으며 나서기를 즐겨 하고 웅변하기를 좋아한다.

 

 또 인간됨=인격의 평가는 다수의 추종자에 의해서 가늠하는 게 아니다. 참된 지혜와 행위의 결과로 평가된다. 빌어먹는 거지를 가엾이 여겨 나눠주긴 했지만, 절대로 남에게 구걸하거나 빌리는 처지는 되지 않았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 하는 속언을 듣고 자랐지만 그건 거지 근성으로 가장 저질의 삶이라고 배웠다. 또 높은 지위나 경제적 고수익도 인격과는 별개다 갑질의 횡포와 저질의 인격을 보지 않는가,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지혜와 행위의 빛이 세상의 어둠을 밝힌다.

 

 본디 말이 짧아야 사랑이 길다. 감정 나열이 적어야 사랑이 깊다. 지성이 감성을 다스린다. 이렇게 알고 말해도 실천하기란 어렵다.

 

 삶의 자유를 추구하지만, 진정으로 ‘자유하기’란 참 어렵다. 내가 붙잡고 있는 생활의 방식을 끊어야 한다. 스스로 원하여 스스로 놓아야 한다. 그때 진정한 자유요 자연인일 것이다.

 

 


 

 

김용옥 시인(익산) / 세상 빛

 

 

 “아가, 이 세상빛을 두 번 못 보아, 명심해라.”

 

 행여나 죽고 싶다는 생각을 절대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어머니는 시를 짓지 않았어도, 은유 혹은 암유의 달인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그 말을 붙잡고 자살 충동에서 벗어나곤 했다, 이 세상빛! 기막힌 오직 한 번뿐인 목숨을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어머니는 시인처럼 말했다.

 

 “아가, 사람들이 인심 쓰듯, 너는 고아라고 불쌍히 여겨 주겠지만, 니 어미에겐 이유도 없이 돌팔매를 던질 거다. 그러나 너는 어미 편이어야 한다. 니 엄마의 치마가 바람에 펄럭거리기만 해도, 아무 데서나 속곳 내보이는 여자라고 함부로 말하는 게 세상 사람이거든. 그런 말은 발도 없이 천만리를 가니라. 할미 말을 명심하고, 넌 귀머거리처럼 해야 한다. 니 에미를 이 세상에 붙잡아둘 사람은 아가, 너뿐이야!. 할머니가 기도가 모자라서 내 딸이 억울하게 생과부가 되었구나. 내 딸이 가엾어서 어찌할거나!”

 

 겨우 열세 살짜리 손녀를 두고 간절히 이르시며 내 어머니는 우셨단다. “이건 비밀!”이라고 하며 어머니가 내 딸에게 말씀하셨지만, 딸은 “할머니가 하지 말라는 말까지 하네.” 그러면서 내게 말했다. 이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효막심한 죄를 저지른 사람인 걸 뼈저리게 알았다.

 

 그렇다, 이 세상 소풍은 한 번밖에 안 온다. 아니 못 온다. 실컷 누려라, 고통까지도.

 

 


 

김용옥 시인((익산)

1946년 전북 익산 출생, (金容玉). 1988년 『시문학』 추천 완료. 중앙대학교 영어영문과 졸업​. 전북문학상, 박태진문학상, 전북예술상, 전북 해양문학상, 구름카페문학상, 전영태문학상, 다수. ​시집 『서로가 서로를 원하는 이유는』 『세상엔 용서할 것이 많다』 『그리운 상처』 『누구의 밥숫가락이냐』 『이렇게 살아도 즐거운 여자』 『새들은 제 이름을모르다』 수필집​ 『生놀이』 『틈』 『아무것도 아닌 것들』 『생각 한 잔 드시지요』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