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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겸 시인 / 백밀러 속의 영상
낡은 승용차 한 대 오르막 산길에 버려져 있다 깊이 패인 헛바퀴자국에서 산길을 오르고 싶은 필사의 흔적을 알 수 있다 번호판은 탈색되어 앞 범퍼에 힘겹게 매달려 있고 투명했던 앞 유리는 병든 폐부처럼 뚫려 있다 바람이 빠져나간 네 바퀴의 홈에는 거친 황토와 모래알들이 촘촘히 박혀 있다. 운전자가 없는 운전석 하이웨이 주유소 상표가 부착된 크리넷스티슈 박스가 구겨져 있다 조수석, 손 달력에는 반라의 여인이 말 잔등 위에서 자유의 여신상처럼 소주병을 높이 치켜들며 찡긋 웃고 있다 달리는 동안 운전자는 저 여인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유혹을 받아 왔을까 깨진 차 유리문으로 차안에 갇혀 있던 욕망의 잔재들이 영혼처럼 빠져 나가고 있다 실명한 양쪽 헤드라이트 앞으로 어둠이 눈치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다 사선으로 깨어진 백미러를 본다 황토 빛 빗살무늬토기 한 점 클로즈업 되고 있다
정겸 시인 / 공갈꽃
여의도 서편에 자리 잡은 아고라 정원 울긋불긋한 꽃들이 정결한 척, 한바탕 피어 있다
자유와 민주, 평화를 위한 구원의 나팔수라며 세상에 좋다는 소리는 모두 따 붙여 가며 4년마다 피는 꽃, 파리지옥 같은 공갈· 꽃
아무 꽃나무에 물거름 주어도 꽃놀이패라며 흥얼거리다 꽃 농사 망친 아버지 파랑꽃 노랑꽃 빨강꽃..... 꽃 소리만 들어도 질린다 했다
아버지, 이제는 아무 나무에 물거름 주지마세요 이번에는 튼실하고 향기 좋은 꽃, 제대로 찍어보세요 언뜻 불어 온 봄바람에 흔들리지 마세요 촛불에 현혹되면 안 돼요
아프리카 사막에 피어난 재스민 같은 그 꽃, 기어코 만나고 싶어요
정겸 시인 / 반란을 꿈꾸는 여자
작은딸 대학 진로문제로 아내와 한바탕 서바이벌 게임을 했다 피아를 구분할 수 없는 난타전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휴전중이다
아내는 복수라도 하듯 20여년 전 내게 짜 주었던 털조끼의 실을 풀어내고 있다 한동안 내 가슴을 감싸주었던 몸을 일부가 둥근 실타래로 변신하여 거실 바닥을 뒹굴고 있다
다시 뜨개질을 하는 아내의 손이 다소 거칠어져 있다 손때 묻은 대나무 바늘을 엇대면서 칸칸이 새 집을 짓고 있다 낡은 실 속에 맺혀 있던 찌든 먼지를 삼키며 비집고 비틀면서 이제 겨우 벽돌 한 켜를 쌓아 올렸다
탄력을 잃어버린 느슨해진 털실 이제야 바로 잡겠다는 듯 정사각형의 틀을 촘촘히 엮으가고 있다 저 여자 어쩌면 내 몸을 해체시키고 반란의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모른다
정겸 시인 / 꽃못
마룻대 상량문이 희미해진 봉선사* 운하당 대목장大木匠 정씨는 낡은 법당이나 요사채를 수선할 때마다 결 곧고 심지 굳은 나무못 만들었다 굵거나 가는, 길거나 짧은 나무못 수십 개가 가지런히 툇마루에서 햇볕 쬐고 있다
대들보와 서까래 사이가 느슨해져 틈 벌어졌다 나무와 나무 잇댄 자리 홈을 내어 다시는 인연의 끈 놓지 말라고 나무못으로 옭죄며 접합시켰다
맞대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세상 서로에게 아픔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같은 유전인자끼리 살을 섞어야 오래오래 버티며 살아갈 수 있다고 했다
'화중생련火中生蓮' 연꽃 축제가 한창인 사찰 앞 연蓮밭 이곳은 향기와 소리, 바람마저 묵언이다 초록빛 못들이 들쭉날쭉 무수히 박혀있고 정두頂頭에는 꽃등 하나씩 매달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아프지 않게 이어주는 꽃못 하늘과 물과 땅을 단단히 묶어놓고 있다
*남양주시 진접읍에 소재한 조계종 제25교구 본사.
정겸 시인 / 바오밥나무가 있는 별나라
내가 살고 있는 별나라에는 바오밥나무가 울창하다 그곳에는 태생에 대한 비밀이 있고 고향의 전설과 아내와 아이들이 있다
별나라를 갈 때에는 주민등록증도 필요 없고 비자와 여권이 필요 없다 비밀번호 하나만 있으면 갈 수 있다 나는 별나라를 가기 위해 하루 종일 땀에 젖었던 발을 말리며 도심의 유리관 속에서 꽃이 필 때를 기다린다 어두워지는 거리마다 형형색색의 꽃들이 피어 날 즈음 별나라로 가는 문턱에서 비밀번호를 꾹꾹 누른다 몇 번씩 클릭 하는 숫자 앞에 나타나는 불청객 번호가 틀렸으니 다시 한 번 눌러 주세요 몇 개의 숫자를 조합해 가며 번호를 누른다 힘을 주어 반복하기를 다시 몇 번 철컥, 문이 열린다
현관 게시판에 나란히 꽂힌 메모지들 "문화센터에 갔다 오겠음" "오늘 친구와 저녁약속 있어 늦습니다" "학원 다녀오겠습니다"
이사 올 때 증정 받은 거실의 걸개그림에는 바오밥나무 한 그루가 모래 바람을 맞으며 꼿꼿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판화처럼 음양의 윤곽이 뚜렷한 바오밥나무 갈피사이로 적막이 숨어 있다 나도 바오밥나무처럼 우두커니 서 있다 별이 총총한 사막의 밤하늘에서 별 비가 내리고 있다
정겸 시인 / 유서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나는 전류의 흐름이 그치고 필라멘트가 끊어진 전구처럼 고독하다' 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아버지가 가출 했다
실종신고 석 달 만에 돌아온 것은 달랑 유서 한 장 이었다 검은색 비닐 봉투 속 꼬깃꼬깃 접혀 있는 색 바랜 종이에는 농협 통장의 비밀번호와
'늘 바람과의 전쟁에서 겨우 살아 온 늙은 몸 손자에게 티비 채널권 빼앗기고 애완견에게 밥 먹는 순서마저 빼앗겼다' 라고 적혀 있었다
정겸 시인 / 좀비족이 사는 섬
SBS 모닝와이드 뉴스 일본 북해도 남서 해역 부근에서 진도7.6의 지진 발생, 국지적으로 30m의 높은 쓰나미파의 쳐올림이 활동 중이며 우리나라 동해안 일부에서 쓰나미 월파고가 관측되었음.
중생대 이후 가장 활발한 지각운동이 시작 되었다 바다에는 물이 마르고 수평선이 없어지고 섬들은 하나 둘씩 기형화 되어 도심으로 기어 나왔다 불안한 지층은 자고 나면 융기되거나 침강되었다 삐죽삐죽 솟아오르는 섬들 사이에서 자동차들은 거친 파도처럼 갈기를 세우고 밀려왔다 밀려가고 있다 나는 유대인이 되어 바람막이 없는 교통섬에서 초조하게 모세의 기적을 기다린다 온종일 나를 괴롭혔던 애굽인*들이 아직도 목덜미를 잡으며 놓아주지 않고 있다 파란불이 켜지자 바닷길이 열리고 쫓기던 유대인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친환경 로고가 그려진 자연&아파트 단지 옆, 초록색으로 덧칠된 선박 카페 한척이 정박해 있다 선상에서 주위의 섬들을 바라보고 있다 툭툭 터진 마른 갯벌사이로 푸른 바닷말이 간간히 보이고 촘촘히 떠 있는 섬들은 날이 갈수록 견고한 석회석으로 진화되어 갔다 한 무리의 좀비족들이 석회석 동굴 속으로 일개미처럼 들락날락거리고 있다
*애굽 : 고대 이집트국가로써 유대인을 노예화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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