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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성만 시인 / 율정점에서의 이별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9.
고성만 시인 / 율정점에서의 이별

고성만 시인 / 율정점에서의 이별

 

 

1.

아우님, 자네가 먼저 길 나서시게

 

배교의 쓰라림도

반역의 캄캄함도

화로 위

해당화 꽃잎

불타오른 저녁해

 

2.

형님, 이번이 마지막은 아니겠지요

 

밤 새워 우는 말

낮닭의 홰 소리

죄었이

죄를 지어서

육자배기

휘어진 길

 

* 정약전, 약용 형제가 유배 길에 묵은 주막

 

 


 

 

고성만 시인 / 가을 우편함

 

 

당신 거기

가셨군요

낙엽 지는 골짜기

 

나는 여기 이렇게 웅크려 듣습니다

당신이 그 먼 거리에서

저벅저벅 걷는 소리

 

서서히 체온이 내려가는 연못 안

서둘러 교미 마친 우렁이의 분홍 알

 

겨울이 두려운 별들은

눈물 글썽인다지요

 

단풍나무 아래 숨어 슬피 우는

시월의 밤

당신은 구름과 통화하느라 바쁘셨죠

 

바람의 머리카락을

죄다 셀 것 같은데

 

잘 익은 적막이 바스락대는 산과 들

주변까지 밀려온 단풍을 보면서

 

아 하고

한숨 내쉴 때

저 혼자 붉은 우편함

 

-《정형시학》2022. 겨울호

 

 


 

 

고성만 시인 / 새들은 왜 저녁에 날까

 

 

도대체 두려움이라곤 모를 것 같은

독수리들은 왜 그 먼 몽골에서

비무장지대 근처로 날아올까

도대체 외로움이라곤 모를 것 같은

고니들은 왜 그 아득한 시베리아에서

주남저수지까지 날아올까

커다란 슬픔 아래선

작은 아픔이 별 것 아니라는데

시나브로 어두워지다가

이내 캄캄해지는 저녁을 맞는 일이

갈수록 막막한 이유는

꽃으로 피어나는 노을,

오늘 하루치의 기쁨이 사라지고

별빛마저 찾기 힘들어지기 때문에

부산스럽게 갈대숲으로 돌아가

아직 어린 자식들 돌보며

세상 마지막 날처럼 불덩이 삼키는

바다를 배경으로 한바탕 춤

박수소리 펄럭이는 것이리 새까맣게

가창오리 떼를 불러와

자기 몫의 한숨 달래는 것이리

 

 


 

 

고성만 시인 / 꼬리

 

 

누구는

척추가 길어진 거라 했고

누구는 창자가 빠져나온 거라 했는데

면접시험 칠 때

애인과 마주 앉을 때

존경하는 시인을 만날 때는

밟히지 않도록 조심했고

돈 많은 사람

낯 두꺼운 사람

여유 넘치는 사람 앞에서는

슬쩍 꺼내어 살살 흔들었던,

차마 내키지 않는 일

눈 뜨고 봐줄 수 없는 일

참을 수 없이 화나는 일에는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지만

파르르르 떨리는 그것

 

 


 

 

고성만 시인 / 가방을 깔고 앉은 사내

 

 

 물방울무늬 넥타이를 맨 사내는 차를 기다린다 무슨 심각한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여벌의 옷과 연장, 날짜와 회계가 적힌 노트가 담긴 가방을 깔고 앉아 천천히 담배를 피운다 일전 딸이 쥐어준 편지는 모서리가 닳았다 아빠 사랑해요 이번 주말엔 오실 거죠? 애야 주말이 뭐니 비 오는 날이 주말이지 사내의 등 뒤로 갓꽃 한 무더기가 흔들렸다 손을 들어도 서지 않는 차를 보며 뭐라 중얼 거리던 사내는 일어나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양복 등허리와 바짓가랑이가 주름진 채

 

 


 

 

고성만 시인 / 동백

 

 

마음은 그곳에 두고

꽃은 예 와서 피우니

이 일을 어쩌나

햇살 좋은 담 아래서

때깔 고운 꽃을 피우고 있으니

이 일을 어쩌나

 

마음은 그 곳에 헤매더라도

몸은 예와

뜨겁게 달구고 있으면

따뜻한 살 한 점

묻히고 가는 새가 있으니 됐지

 

새 숨조차 숨어버린

하늘 아래서

슬쩍 슬쩍 스치고 가는

도둑의 손길을 어쩌란 말인가

도둑이라도 있으니 됐지

어쩌란 말인가

 

 


 

 

고성만 시인 / 바퀴를 닦는 여인

 

 

 세차게 물이 쏟아져 나오는 호스의 끝을 잡고 전생에 닦거나 칠하도록 신의 명령을 받은 것처럼 정성스레 차를 문지른다 신문을 보던 손님이 차가 늦게 나온다고 투덜대자 호스가 춤을 추었다 호스에서는 아이들의 학비가 나오고 아파트 중도금이 나오고 일용 할 양식이 마구 쏟아져 나올 걸로 믿어온 세월, 무지개를 그리며 물을 뿌리는 여인은 오늘 하루 수십 개의 굴러가지 않는 바퀴를 닦았다

 

 


 

고성만 시인

1963년 전북 부안 출생. 조선대 국어교육과, 전남대 교육대학원 졸업. 1993년 《광주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1998년 《동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올해 처음 본 나비』 『슬픔을 사육하다』 『햇살 바이러스』 『마네킹과 퀵서비스맨』 『잠시 앉아도 되겠습니까』 『케이블카 타고 달이 지나간다』. 시조집 『파란, 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