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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성은주 시인 / 쉼표의 감정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9.
성은주 시인 / 쉼표의 감정

성은주 시인 / 쉼표의 감정

 

 

그림자가 길어질 때 우린 가던 길을 멈췄다

 

여기서 저녁을 배웅하자

 

어서 외투를 입어

 

차가운 물빛이 당신의 이마에 흘렀다

 

물끄러미

 

기울어진 살결 담아내기 위해

 

나는 지문을 지우고 있는 의자를 건넸다

 

이젠 실컷 소리 내어 울어도 좋아

 

-시집 『창』 2022

 

 


 

 

성은주 시인 / Kiss

 

 

너라는 길이 나로 이어지는 골목

 

대문 열리는 소리 들릴 때마다

무릎을 세워

겹쳐지는 그림자를 따라간다

 

초록 입술로 웃으면

흔들리는 가지 끝에

새가 잠시 머물다 갔다

 

공중에서 깃털 하나가 느리게 떨어진다

 

 


 

 

성은주 시인 / 새 창을 달다

 창을 닦는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안쪽 때문일까 바깥쪽 때문일까

 나의 얇은 창에 먼지가 가득하다

 물방울을 떨어트려 닦아도 닦이지 않는다

 가끔 뒤척이는 구름의 살점이 보인다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 들판을 걷는 바람이 어쩌다가 흙내를 몰고 들어올 때가 있다 창을 닦는다 주기적으로 관리를 해 주지 않으면 유리는 더욱더 혼탁해진다 창을 닦는다 가끔 검은 점이 생겨 신경이 많이 쓰인다 창을 닦는다

 뿌옇게 나무가 두 개로 겹쳐 보일 때가 있다

 찬란하게 흔들리는 빛의 몸짓을

 깜박거리는 춤을

 오래 지켜보다가 서서히 어두워지거나

 사라지는 발목이 창가에 쌓인다

 창문 없는 방을 떠올려보다가 혼탁해진 창을 새 창으로 갈아 끼웠다

 조용히 스르륵 움직이는 밝은 빛이 침착하게 새 창을 뚫고 들어온다 새 창도 주기적으로 물방울 뿌려 닦아 주고 정기적으로 관리를 해 줘야 검은 테두리가 생기는 걸 예방할 수 있다고, 예방해도 무너지는 것들이 있다 무너지는 것은 무게를 못 견딘 잘못인가 무게의 잘못인가

 작은 창에 사랑하는 풍경이 모두 잠긴다

 돌보고 돌보다 돌아보게 되는 일처럼

 창을 닦는다

 새잎이 돋는 나무를 본다

- 시집 『창』, 시인의일요일, 2022년,

 

 


 

 

성은주 시인 / 수국

 

 

물을 껴안은 해안도로가 단단하게 엎질러 있다

 

어디로 망명해야 할지 모를 파도가 뒤척일 때

얇은 몸짓으로 빠르게 헤엄쳐 오는 물거품

 

검은 돌담에 기댄 거미줄처럼

가난한 거리에서 서로를 더듬고 바스락대다가

길어진 장마를 탓하다가

애인이 애인을 만들어 버리고

금이 간 유리병에 담겨 파란 비늘을 파닥인다

 

잘려 나간 줄기가 수평선을 가리키면

아무것도 기억 못하는 눈동자처럼 배가 지나간다

함께 길 잃어도 다정했던 섬에서

무심하게 시들어 버린 그늘을 훔쳐본다

 

-시집 <창>에서

 

 


 

 

성은주 시인 / 포르트 – 다*

 

 

그녀의 팔엔 작은 바늘땀과 같은 무늬가 있다

푸르게 번진 팔을 휘두르며 어딜 자꾸 가시나요

 

차가운 회전문 밀고 들어가 반나절 숨어버린 그녀

나는 문이 돌아갈 때마다 두리번거리며 서성였다

 

긴 시간 풀었던 실을 몸에 칭칭 감고 나타났다가

흰 이불을 뒤집어쓰고 다시 숨어버린 그녀

 

중환자실 문고리 잡고 ⎯ 서

 

멀어진다는 것은 찢겨 나간다는 것

 

플라스틱 실패가 앙상해져도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떨어진 단추 빈자리에 실밥 같은 잔디만 올라왔다

 

*fort-da: 아기가 어머니의 부재를 연습하는 게임

 

 


 

 

성은주 시인 / 타임아웃

아이처럼 오래 울었다

의자에 앉아 손톱이 짧아질 때까지 창문 밖 구름을 생각했다

종종 거꾸로 매달린 것들을 떠올리며

멈췄다

달팽이가 여기저기 굴러다녔다

촛농처럼 쿠키를 굽던 엄마는 오지 않았다

여전히 좋은 사람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매일 반성하는 버릇이 생겼고

열쇠 돌리는 방법을 잃어버렸다 짧은 노래 외우다가

길들여진 음표 하나씩 깨물어 먹는 맛에 빠져

짙은 안개가 쌓인 줄 모르고 나란히 발을 담갔다

구멍난 양말 같은 표정으로

여전히 난 질 수밖에 없다


​성은주 시인 / 쉬쉬

알면서 모른 척 지나쳐 본 일이 있다

이웃집 언니가 가게에서 초콜릿을 훔치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물방울처럼 생긴 눈을 계속 감았다 뜨는데

곧 비가 내릴 것만 같았다.

밤이 되면 사람들은 각자의 방에서

눈동자를 켜고 환해지다가

하나씩 전원을 내리고 어두워졌다

뾰족한 빗방울이 무서워 두꺼운 이불 속에 숨었다

이웃집 언니는 욕실 타일을 하나씩 뜯어 입에 넣어 주었다

깜깜한 바닥을 더듬거리는 동안 균열이 생겼다

축축한 말들이 노랗게 젖어 있었다

​​

-시집 『창』 중에서

 

 


 

성은주 시인

1979년 충남 공주 출생. 한남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 대학원 석사과정 및 박사과정(박사학위). 201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시집 『창』.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장으로 활동 中. 현재 한남대학교 초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