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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임희숙 시인 / 고흐의 아이리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9.
임희숙 시인 / 고흐의 아이리스

임희숙 시인 / 고흐의 아이리스

 

 

화병에 빼곡하게 발목을 담근 꽃들은

넘어지지 않으려고 저희끼리 허리를 부둥켜안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필사적이다

꽃은 어디서나 우아하고 아름답게 피어나야 하므로

살아남고자 하는 꽃들의 불안한 자태는

시들거나 꺾이거나 뽑혀나갈 차례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래서 고흐는

지금 항아리에 담긴 정물의 공간과

시들어가는 꽃의 시간을 정지시켰다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은 항아리의 불안과

살아야 하는 꽃의 사생결단이 맞붙어

백 년이 넘도록 꽃들은 발목을 빼내지 않았다

어렸거나 젊었거나 병들었거나

꽃의 몸이 멈춘 항아리는

누구나 머무르고 싶은 세계다

 

어디서나 그렇듯 죽고 싶었던 몇몇

주둥이에 엎어져 몸부림치는

살아있는 꽃의 슬픈 모가지들

 

-시집 『나무 안에 잠든 명자씨』(시안, 2011) 중에서

 

 


 

 

임희숙 시인 / 갯벌의 시간

 

 

맨발로 저녁 갯벌에 서 있으면

내가 삼천 팔백 년 전 누란樓蘭에 살던

마흔다섯 살 여자라는 생각

발가락을 빠져 나가는 뭉클한 진흙 더미

한 사람의 시간이

온몸을 칠칠 휘감고 돌아나가는 한 번의 물때보다

더 진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수많은 사랑과 수많은 근심이

죽고 살고 죽는 조수의 시간 보다 더 위대할 수 있는가

한 사람의 생애가

불가사리의 몸을 갈라 거기 갇힌 장미꽃을 끄집어내는 시간

꽃을 지키는 푸른 가시를 하나씩 부러뜨리는 시간

그보다 더 오래라고 말할 수 있나

아직 소화되지 않는 짱둥어와 백합조개와 낙지가

살아서 튕겨져 나오는 갯벌의 사타구니

생애를 따라 천천히 가던 시계가

빛의 속도로 날아가 태양계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동안

박물관 진열대 안에 누워있던 여자의 시간은

삼천 팔백 년을 거슬러

강화도 초지리 갯벌에서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임희숙 시인 / 숭례문 살미 쇠서,

백악송공(白岳松公)의 묘갈명*

 

 

 숭례문 오백 년의 관절이 으스러질 때 그 몸이 담고 있던 풍경과 세월도 사라졌다 그리고 두 해가 지나 누가 날 찾아왔다 자신은 숭례문 살미 쇠서였던 백악송의 후손으로 화재로 타 죽은 조상을 위해 묘갈명을 써달라는 것이었다

 

 공은 북악의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다섯 살의 나이에 숲 너머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스스로 알았다 약관에 이미 장정의 몸통을 지녔고 그 곧음이 하늘을 찌를 듯 높아 장차 크게 될 소나무라는 칭송을 받으며 자라났다 공의 나이 팔순이 되도록 허약한 아비의 곁에서 비바람을 막아주고 천지간天地間을 읽어주며 효도하다가 성종9년 숭례문 중건에 선발되어 역사에 큰 공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평생, 보고 듣고 삼킨 일이 봄날 아침의 는개 같았고 귀 막고 눈 감고 심장을 내려놨던 일은 여름밤 우레보다 더 많았다 근래에 시간의 엄청난 질주 속에서도 고고한 늙은이로 버텼던 것은 오직 숭례문 쇠서로서의 존재를 다함에 있었다

 

 여기에 공의 후손이 묘갈을 남기니 오늘로써 공의 이름과 가문이 후세에 알려지게 되었다 새로 온 살미 쇠서가 다시 숭례문의 수백 년을 살아간다 하더라도 공이 살다 간 오백 년과 어찌 같다고 하겠는가

 

 백악송공이 죽은 지 두 해가 되는 2010년 2월 10일 이름 없는 시인이 소박한 묘갈명을 남긴다

 

 숭례문 지붕을 떠받치는 다포의 끝자락에

 소의 혀처럼 올라붙은 작은 나무조각이었지만

 공은 화마와 맞서 싸우다 장렬히 불타 서 있던 터에 한 줌 재로 돌아가고 말았네

 아 타다 남은 대들보는 다시 쓰인다지만

 어찌 아름다운 살미 쇠서보다 더 아름다워서이겠는가

 오백 년 뒤, 그 자리에 한 소나무가 도로 서리니

 

* 살미(山彌)쇠서(牛舌): 한옥지붕의 공포를 이루는 부재

* 묘갈명(墓碣銘) : 무덤 앞에 세우는 작은 비석에 새기는 글

 

 


 

 

임희숙 시인 / 머나먼 나무

 

 

서 있기만 해도 잘 자라는 나무가 있다

그가 먹은 것은

일억 사천팔백만 킬로를 달려온 햇빛

전라남도 보성군 비봉리 바닷가

팔천오백만 년 전 공룡의 알둥지를 헹구고 온 바람

오천 년을 떠돌다 지금 막 당도한 어느 항성의 별빛

거기에 등을 기대던 외로운 시인의 체온

어젯밤에 나무뿌리를 적신 아기의 오줌발

 

나고 지고 나고 지고

나무는 제 안의 녹색 알갱이들을

바람결마다 뱉어 놓는다

잎사귀 안에 돌돌 말린

잠든 짐승의 이마를 덮던 햇빛

벌레의 배꼽에서 흘러나온 별빛을

난전처럼 펼치고 있다

 

곧 항성에서 온 별빛은 오천 년을 되돌아가

짐승에게 귀가 뜯긴 돌멩이와

오천 년을 기다린 늙은 시인을 위로하고

잎사귀였던 오줌기저귀를 항성의 깃발 아래 묻을 것이다

깃발은 그 별의 나무처럼 펄럭일 것이며

머나먼 그 사람들은

별빛만 젖어도 바람만 묻어도 잘 크는 깃발에게

입술을 오므리며

나무라고 부를지, 모른다

 

 


 

 

임희숙 시인 / 평사낙안(平沙落雁)에서 몸을 굽다*

-하동 평사리에서

 

 

평생을 몸에 물 적신 모래들

다른 한 평생은 햇볕에 몸을 굽는다

엎어지고 뒤집으면서 다 비워내고 단단해질 때까지

무수히 떠도는 광물의 마지막 원소가 될 때까지

비우고 비운 모래알의 내부는 빈틈이 없다

 

평사리 햇볕에 몸을 구운 모래들은

강물의 농토가 되고 거름이 되어주면서

평생을 날아다니느라 지친 새들을 품는다

모래톱을 이루는 보잘 것 없는 원소기호를 등에 지고

물에 몸 담글 다른 생이 오기까지 뜨거운 생을 산다

 

섬진강이 마른 모래의 몸을 건너서 간다

배꼽에 뜨거운 모래가 닿으면

부서지고 쪼개져서 는개로 환생하는 강물

한 평생을 기다리는 모래를 적신다

 

온전한 그림 한 벌, 온전한 기다림 한 평생

누구에게나 그렇게 지나가지만

가끔씩 새들의 발가락에 묻어난 모래알

은밀히 그림 밖 세상을 문지르는 가을 풍경

 

*平沙落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소상팔경瀟湘八景> 중 기러기가 내려앉는 백사장 풍경

 

 


 

 

임희숙 시인 / 수박씨의 시간

​씨앗이 흩어진 풀꽃 무늬 쟁반 위로

여름비가 내리고

우물처럼 깊어진 집

벌레가 두고 간 껍질과 짐승의 터럭을 안고

꽃은 제 시절에 늙어갔다

우물이 마르고 눈이 내리고

어긋난 무릎의 각질이 나이테로 쌓이는 동안

다시 풀이 자라고 꽃이 피고

수박씨의 수액이 붉은 홍수처럼 흘러내리도록

빙하기는 오지 않았다

질긴 방패를 뚫고 흘러나오는

수박씨가 우물을 삼킨 시간

온갖 풀꽃들과 짐승들을 키워낸 씨앗

누구나 한 생은 그렇게 시작된다

 

 


 

 

임희숙 시인 / 잠원(蠶院)에 대하여

 

 

한강을 건너 잠원을 지나면 터미널이 있다고

스승님은 말씀하셨다

터미널에 도착하기까지 아니 차표를 손에 넣을 때까지

아니 아니 그곳에 도달하기까지는

기다리고 기다리라

 

잠원은 이름처럼 뽕나무를 키워 투에를 살리는 곳

열차의 열린 문 안으로 누에들이 들어왔다

짜다 만 비단 피륙을 어깨 아래로 늘어뜨리고

배우처럼 상기된 얼굴로 빈자리에 앉는

젊은 누에 한 마리와 눈을 텄다

몸집을 불려야 고치를 짤 힘을 얻는 법

나도 누에처럼 다리를 꼬았다

 

뽕나무 잎사귀만으로 든든하냐고

스승님이 키우실 나무의 잎사귀는

그림보다 더 푸르고 무성할 것이라고

그 안에 감춘 비단실은 더 찬란할 것이라고

도를 아시나요 무릉을 아시나요 나루터를 아시나요

젊은 누에의 팔랑귀에 대고

창문을 낼 톱과 망치를 마련했다고 말하려다

집 지을 모래와 뽕나무 기둥과 커튼을 짤 명주실까지

말해 주려다 터미널이 지나갔다

 

다 다 그만두었다

다행이었다

 

⸺  계간 《문학청춘》 2020년 가을호

 

 


 

임희숙 시인

서울에서 출생. 1991년 《시대문학》으로 등단. 명지대학교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학위 . 시집 『격포에 비 내리다』 『나무 안에 잠든 명자씨』 『황홀- 그림과 시에 사로잡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