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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연 시인 / 은어의 방
친구가 나에게 기도해 줄 것이 있느냐 물었을 때, 나는 덤덤한 입술로 말했다 '내 방이 가지고 싶어' 그 말을 듣고 친구가 웃었을 때 버스럭 가슴이 접혔다
나는 간절히 나의 방을 소망했다 내 방에다 은어 한 마리 키우고 싶었다 빛나는 은어를 쓰다듬으며 배를 맞대고 헐떡이고 싶었다 아가미에 입술을 대 비밀 전화를 하고 문틈으로 잠든 나는 보는 아버지를 향해 총을 쏘고 싶었다 계절이 바뀌면 아름다운 이불로 드레스를 해 입고 긴 다리를 드러내고 웃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광장에서 잠을 자며 처형을 당했다 매일 나는 눈을 감고 나무로 짠 관을 상상했으며 그 냄새를 맡고 벽과 천장을 매만져 보았다 내가 갖게 될 처음아자 마지막 비밀 공간
누구의 발자국도 지나가지 않은 그 곳에 침대를 놓고 은어를 풀고 나는 눕는다 그리고 혼자서 자지 못한 잠을 오래도록 잔다
배수연 시인 / 괄호
우리 동네 명호 동호 진호 성호 인호 상호 괄호 중에 내 이름은 괄호 나는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바구니, 세상에서 가장 깊은 바구니를 가지고 있죠 이 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나는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나는 괄호, 가장 커다란 바구니
이 안에 들어오는 것은 이 안에 심기는 것입니다 이 안에 들어오는 것은 나로 인해 자라 잎사귀를 펼치고 열매를 매답니다
나는 괄호 내 이름은 괄호 나는 팔을 벌려 가슴을 넓힙니다 내 안에 들어오고 싶은 세상이 나를 만들었나 봐요
배수연 시인 / 홀로그램 비둘기
너는 비둘기 포비아가 있지 비 오는 날 하수구 옆에서 불어 가던 거대 와플 나는 까만 국물을 흘리며 풀어지는 와플을 쪼아 먹었어 S. 그래도 내겐 아름다운 목덜미가 있는걸 너의 베개 한편에 비둘기 둥지를 지어 줄게 네가 자는 모습을 바라봐도 될까? 오늘의 부리는 조금 신경질적이야 오늘의 콘크리트는 조금 더 통명스러워 식구들의 부리는 닳고 닳아 콧구명 앞까지 왔네 S. 혼자 밥을 먹는 점심시간도 공을 받아 줄 사람이 없는 체육 시간도 끔찍하게 끔찍해서 마스크를 썼지만 모두 내 부리를 알아챈 걸까 부리 대신 한 번만 아름다운 목덜미를 봐 주었으면 너는 비둘기를 싫어하지만 우리 엄마는 어제도 빌딩의 배관에 새끼를 깠어 회녹색 깃에 낀 검은 기름때는 도시의 가난처럼 지울 수 없는 거래 S. 너의 베개 한편에 둥지를 허락한다면... 나는 너의 꿈에 내 목덜미의 홀로그램을 흘려 줄게 비루함과 반짝거림이 자주와 청록의 오로라로 휘어지는 홀로그램 극장 백야의 호수 위를 지나는 구름의 몽상과 도시를 떠나 숲으로 찾아드는 새 떼의 이야기를 상영할게 잠이 깨면 등굣길 정류장에서 내 손을 잡아 줘 판타스틱 홀로그램 오로라 극장 너는 내 목덜미를 끌어안고서야 아침의 첫 숨을 뱉을 거야 그 숨은 내 작은 귓구멍 위에서 흘러넘쳐 우리의 발등을 적실 거야
배수연 시인 / 눈빛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을까 눈에서 나오는 빛
미소를 짓거나 말을 걸지 않아도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동하는 빛
용돈을 털어 두 눈빛에 그윽한 바이올렛 그레이를 입혔어
너랑 나 말고 아무도 모르게
마음에서 마음으로 달려가는 빛
배수연 시인 / 그는 참 좋은 토스트였습니다
그는 참 좋은 토스트였습니다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못난이 핫도그가 추도문을 읽었습니다 그는 아름다웠지만 뽐내지 않았고 그는 가진 것이 적었지만 인색하지 않았고 그는 경직된 순간에도 유머를 잃지 않았으며...............
아, 솜사탕은 이 대목이 너무 슬픈 나머지 눈물을 흘리며 아랫도리를 적셔 버렸습니다
토스트의 두 귀는 얼마나 적당한 갈색이었는지 아침 햇살에 윤이 나는 정수리는 얼마나 단정했는지 그의 가슴은 얼마나 바삭하고 부드러웠는지 토스트기에서 튀어 오르던 그의 명랑한 까꿍
모두가 눈을 감고 그의 아름다웠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그가 모는 버스는 그를 닮은 진실된 사각형이었습니다 버스 안은 고소한 냄새로 가득했고 우리는 따뜻한 배를 두드리며 아기 엉덩이 같은 일출을 함께 본 친구였습니다 아, 누가 그의 버스를 호수로 몰게 했습니까? 그날따라 호수의 우유는 왜 그리 불어났던 건가요? 그의 성긴 속살이 뿌옇게 풀어지는 것을 포악한 오리와 잉어들이 달려드는 것을 우리는 막지 못했습니다
성가가 울려 퍼지고 딸기 잼과 땅콩 버터는 이마를 맞대고 흐느꼈습니다 가로세로 4X6, 호두나무로 짠 관 위로 무수한 국화꽃이 떨어졌습니다
이제 토스트가 없는 아침을 맞아야 합니다. 차가운 시리얼을 삼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십시오 그리고 잊지 마십시오 그는 참 좋은 토스트였습니다
배수연 시인 / 메리골드
이 호텔에 자주 오는 새가 있지 새는 조용히 작은 머리 안에서 팥을 끓이고 있지 팥을 끓이면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눈알을 고정하려고 애를 쓰면서 수건을 채우려 가면 오늘 청소는 생략하겠습니다 혹시 위장약 있습니까? 이 등받이에 자주 앉는 새가 있지 내 어깨에 깃을 얹고, 한 몸이었던 것들이 헤어지는 삶에 대해 이야기했지 자네, 재킷과 바지가 따로 팔린다면 얼마나 슬프겠나 그러나 힘을 내야 하지 이 호텔은 누구나 싱글침대를 쓰고 팥이 타지 않도록 저어줄 당번은 오직 자신뿐이야 하루는 노란 점프슈트의 긴 팔을 세 번쯤 접어 입고는 로비에 앉아 편지를 쓰고 있었어
나는 종종 배가 아프고, 세상에서 가장 작고 예쁜 쓰레기들이 새의 배 속에 있습니다
그래도 하늘엔 새들이 많고 나는 빌당에 매달린 채 창을 닦으며 안녕, 모두 목 끝까지 지퍼를 잠 잠그세요 위를 향해 천천히 손을 흔들었지
배수연 시인 / 달걀 요리사
매년 장래 희망란에 나는 애니메이터, 아나운서, 스튜어디스, 여행작가, 디자이너를 전부 쓰느라 늘 자리가 모자랐다 앞 동네 사는 이유정은 달걀 요리사가 되겠다고 써서 나는 속으로 웃어 버렸다
달걀, 너라면 뭐든 맛있을 거야 달걀, 너라면 뭐든 할 수 있어
하긴 달걀은 우리보다 나아 보였고 고 3이 된 나는 모든 꿈을 포기해 버렸다
유정이는 어딘가에서 달걀 요리를 하고 있을까 아니면, 달걀은 혼자서 푸딩도 타르트도 스크램블도 찜도 모두 되었을까
-시집 <가장 나다운 거짓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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