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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광렬 시인 / 사막에서
물이 보석인 사막에서 마지막 눈물을 위해 하아얀 손수건을 준비했다 빗소리 듣듯 서로를 듣는다 했건만 이제 먹은 귀로 바람이 선인장에게 길을 묻는 열사에서 우린 서로 남남이 된다. 나의 귀는 더 이상 지난 노래를 듣지 않겠다 나의 눈은 더 이상 너의 부재를 읽지 않겠다.
아, 돌아올땐 길도 묻지 않겠다 한 마리 끈기 있는 낙타가 되어 수정 빛 눈물에 젖을 그 손수건으로 박쥐처럼 멀어버렸던 눈들을 가리우고 그저 봄볕에 성긴 눈발 사라지듯 아른아른 아지랑이 되어 사라지겠다.
한 방울, 두 방울 데이지 빛 색깔의 눈물방울들이 끝내 내 헐벗은 발등 위를 구르기 전에 겨울 그 어느 날 막차를 기다리며 주머니 쇠동전들을 만지작거리던 그때, 그 얼음꽃 같은 맨손들을 아, 點들이 되어라 뜨겁게 흔들겠다.
구광렬 시인 / 동치미
동치미 국물 속에 어머니 비친다 젓가락 꽁무니에 무 찔러 놓고 밥 한 술에 무 한 입 베어 삼키면 어느새 어머니 내 몸 속에 계신다 -속 많이 상했구나 술 대충 먹어라 사는 게 별거냐 너 해야 할 도리 다하는 게지 그럼 어머니 난, 사는 게 아니에요 아무리 봐도 자신이 없어요 그 도리라는 것, 장가도 갔어요 자식도 낳았어요 그리고 하라시던 공부도 어느 정도 했어요 그런데 그게 도리의 반의반도 아닌가 봐요 남한테 욕 안 먹고 사는 거요? 참, 그게 힘들어요 남이란 게 여러 종류거든요 나보다 더 나 같은 남이 있는가 하면 생판 화성인 같은 놈이 있어요 어머니께서도 ‘세상사 내 맘 같지 않다’ 하셨잖아요 인생의 반을 남 때문에 사는 세상에서 그 남이 누군지 모르니 인생 반은 헛사는 거죠 근데 나 역시 남에겐 남일 수밖에 없죠 그 지긋지긋한 남. 어머니는 나에게 남이 아니셨죠?
-이제 숟가락 놓고 이빨 닦고 자거라 그 말씀에 동치미국물에 파랑이 인다 이어 어머니 나가시고… 구광렬 시인 / 굽은 나무가 더 좋은 이유
내가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를 더 좋아하는 이유는 곡선이 직선보다 더 아름답기도 하지만 굽었다는 것은 높은 곳만 바라보지 않고 낮은 것도 살폈다는 증표이기 때문이다 내가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를 더 좋아하는 이유는 곡선이 직선보다 더 부드럽기도 하지만 굽었다는 것은 더 사랑하고 더 열심히 살았다는 증표이기 때문이다 땅에다 뿌리를 두고 하늘을 기리는 일이 어찌 쉬운 일일까 비틀대며 살다보면 폭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의 가치를 알게 되고 하늘 한 번 쳐다 보고 땅 두 번 살피다 보면 굽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굽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구광렬 시인 / 들꽃
주인 없어 좋아라 바람을 만나면 바람의 꽃이 되고 비를 만나면 비의 꽃이 되어라
이름 없어 좋아라 넓은 들녘에 지천으로 피어난 우리들 이름은 마냥 들꽃이어라
뉘 꽃을 나약하다 하였나 꺾어 보아라 꺾을수록 들판이 일어나니 코끝을 간질이는 향기는 없어도 가슴을 파헤치는 광기는 있다
들이 좋아 들에서 사노니 내버려 두어라 꽃이라 아니 불린들 어떠랴 어떠랴 주인 없어 좋아라 바람을 만나면 바람의 꽃이 되고 비를 만나면 비의 꽃이 이어라
주인 없어 좋아라 이름 없어 좋아라 주인 없어 좋아라 이름 없어 좋아라
구광렬 시인 / 화장터 매점 김 씨
새 울음을 노래라 말하는 이는 찬란한 아침, 행복한 마음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울음에도 농담(濃淡)이 있어 사람의 울음이 진하면 그 새 울음, 노래로 들리지 않을까? 오늘 자살한 친구 마누라 화장하는 날, 새 울음, 역시 노래로 들리는 것이다 하지만 금지곡을 부르는 듯, 허밍으로만 울음.......
새가 운다고만 하는 이는 눈을 뜨면 서글픈 아침, 불행한 마음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사람의 슬픔이 두텁고 깊다 보면 새 울음쯤이야, 킥킥 웃음으로 들리지 않을까?
아무래도 오늘, 팔공산 화장터 조문객들이 던져 주는 김밥 부스러기, 소주 안주를 먹기 위해 머릴 땅에다 박으며 흥얼거리는 새들은 웃음보를 틀어쥐고 있는 것이다
분골을 들고 나오는 상주들의 울음계곡에서 술 팔고 웃고, 담배 팔고 웃고, 사이다 팔고 웃고, 자기라도 웃어야 되지 않겠냐고, 웃는 게 직업병이 되어버렸다는 6미터 컨테이너 속 커다란 새 한 마리 빼곤, 온갖 새들이 웃음보를 참고 있는 것이다 금지곡을 부르는 듯, 허밍으로만 노래하는 것이다
구광렬 시인 / 슬쁨*
새 한 마리 날자 숲의 밑자락 굳기 시작한다 나무들과 난 거친 파피루스 속 풍경이 되어 원근을 잃어간다 그림 속에 갇히기 싫은 새는 푸드득 날갯짓하지만 다리와 꽁지가 그림 속에 갇힌다 반 이상 그림이 돼버린 산 그림자, 산들바람에도 팔랑인다 그림 밖 새의 몸통에서 떨어지는 깃털은 그림 속 치켜든 내 얼굴을 간질이다 옷자락 무늬가 되기도 하지만 부피 없이 가라앉는다
난 무량한 점으로 이루어진 선, 기력을 다해 몸의 끝점을 그림 밖으로 밀쳐보지만 빠져나가는 건 해질녘 연기 같은 내 그림자뿐. 믿을 건 기도 밖에 없으나 기도는 내 몸의 지도를 더듬을 때만 역사하는 것이니 부피 없는 두 손을 모을 순 없고
흐르는 구름 아래 정지된 숲, 몸통의 반이 그림 밖으로 돌출된 새, 까악 까악 슬피 노래하다 기쁨으로 우는, 막 빠져나가버린 내 그림자 반장
*슬픔 슬픔과 기쁨의 합성 조어
구광렬 시인 / 송광사 가는 길 -말러의 교향곡 1번을 들으며
1 무대 뒤에서 울려 퍼지는 트럼펫소리, 그 신비로운 서주(序奏)에 창 밖 가로수 잎맥들, 팽팽하네 쌀 튀밥 같은 이팝나무, 보릿고개 시절 눈으로만 삼키던 미미(美味), 오지 않을 것만 같던 봄날들, 저만치 매달려있네
트럼펫 팡파르, 차창에 내려앉는 꽃잎들, 27번 국도의 오르막은 한껏 축제 중이라네
못물이 넘실대는 논바닥이 부드럽고 스케르초와 부드러운 왈츠 덕에 차창풍경이 경쾌하네 오케스트라와 팀파니가 하행 모티브를 강하게 주고받으니, 저 모퉁이를 돌면 곧장 풍성한 여름과 만나겠네
2 현악기 하모닉스로 풍경이 술렁이네 흔들리며 밀려가는 농부들, 바이올린, 첼로, 트럼펫, 농기 대신 악기를 들쳐멘 듯하구나 큰북을 이고 가는 양 저 노인네, 차를 세우고 손을 빌려주고 싶지만 저 세상 사람 같네 막 겨울이 야산 끝자락에 회색의 입술자국을 남겼네
뻐꾸기 노래하니 '울지 말고 노래를 불러라, 노래를 부르는 동안, 기쁨이 올 것이니'* 축제의 노래, 고조되지만 애달프게 붉어져만 간 나의 계절, 차창 밖 나무둥치가 돼버린 난, 지난날 뿌리혹들 을 아파하네
3 주암호반도로를 달린다네 수면이 파르르 깨져있네 나무들이 호수 위로 찢겨져 내리누나 '보리수'의 선율을 지닌 트리오, 팀파니의 리듬을 타고 저현이 어둡구나 차창 밖은 봄이건만, 차창 안은 겨울이라네 룸미러에 성에가 끼고 마디마다 겨울이 쌓이네 창문을 내려보지만 날개 잘린 겨울은 쉬 빠져나가질 않는구나
논바닥, 깊게 패인 손금처럼 물속 검은 고랑이 출렁이네 여기저기 모가 꽂히면 저 고갯마루도 말랑해지리라 거칠고 활기찬 스케르초와 유연하고 사랑스러운 트리오가 대비를 이루니, A장조의 렌틀러에 오보에가 대선율에 얽히누나
4 d 단조, 팀파니의 희미한 연타에 등장하는 더블베이스 선율, 뒤이어 등장하는 '카바레 풍'의 밴드 선율, 두 계절 간의 벽이라네
호수 끝 자락쯤, 떠나지 않은, 아니 떠날 수 없었던 철새 한 뭉텅이, 플라맹고 자세를 취하누나 ‘그 대 함께 언약한 내 사랑의 고향, 나 잊질 못하네, 그 아름다운 Annie Laurie를 위해서라면 나, 기꺼 이 목숨을 바치리라**바이올린소리에 첼로가 묻혀버리고 4도 하행 음정이 저만치 들려오네
영화스크린 속의 봄, 관람객으로서 맞는 봄....... 꽃향기, 피 냄새, 밥 냄새, 아, 냄새도 맡지 못할 내 아버지의 겨울 속 내 어머니의 봄 풀어지는 바이올린에 '그녀의 밤색 눈동자'가 애처롭네 멀리 송광사 팻말이 보이고 조계산 끝자락이 막 눈에 들어오네
5 2/2박자, 자유로운 소나타 형식인 포르티시모 총주에 깜짝 놀라네 기어봉을 움켜쥐어보지만 연주자들의 손가락, 입술, 어깨, 지휘자의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이 온몸을 간질이고 문지르네
산이 통째로 차 안으로 밀려오네 계곡물이 스미고 칡덩굴이 핸들을 감아쥐네 차를 길섶 모퉁이에 세울 수밖에 없네
차창 밖 편백나무도, 배롱나무도, 여전히 옷고름을 물고 있는 송광사도 다들 예쁘기만 한데, 천하의 이태백(李太白)의 시에 곡을 붙였던 그가 괴로워하네 ‘대지가 노래한다'고 말한 그가 대지 위에서 눈물을 보이네 안과 밖, 불이문(不二門)이건만 지금 후광 가득 문설주 아래 내 나이 또래인 그가.......
* 멕시코 민요「Cielito lindo」(내 예쁜 사랑)의 한 소절 ** 스코틀랜드 민요 「Annie Laurie」(애니 로리)의 한 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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