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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닢 시인 / 브레인포그의 숲
낯선 잠이 문턱을 넘어온다 밤새 사막을 걸었구나 모래 구덩이는 얼마나 깊을까 푹푹 빠졌다가 푹푹 빠져나오는 발끝이 아름답다
구름이 몰려오는 모퉁이를 돌다 너를 맞닥뜨렸다 갑자기 네가 눈키스를 한다 금세 흩어지는 키스에 뒷걸음질 친다 하얗게 증발해 버릴 것 같았거든
나는 어항 속에 분홍 젤리와 가시덤불을 넣어두고 이미 등을 구부리고 배를 보여주지 않는 너의 형식으로 걷는구나 작은 소리에도 눈을 뜨고 브레인포그 숲으로 간다
잘린 잠의 단면을 들여다보면 모래 속으로 가라앉는 얼굴… 안개에 덮인 발목… 나무들이 잘려 나간 흰 숲이 노란 달을 삼키는 기억은 트랙에 박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노래처럼 끝없이 재생되고
발끝에 발톱이 닿는 순간 너의 죽음이 태어난다 새파란 풀숲을 가로질러 나뭇가지를 툭툭 분지르는 겨울이 달려온다
무릎을 접고 어린 나의 눈동자를 마주 본다 여름에도 털모자를 쓰고 있구나 장갑을 껴도 손이 차갑다
부드러운 털이 얼어붙은 나를 둥글게 감싼다 생생히 살아있다는 듯 말랑한 젤리들이 얼굴로 쏟아진다 송곳니 자국이 생겨난다
너의 노래 속으로 들어간다
―계간 《시와 징후Poem & Symptom》 2023년 여름
김은닢 시인 / 에코백
입구는 열고 바닥은 감추고 싶은 걸까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비스듬히 열린 문이 누군가 부르고 있군 그럴 때 에코백은 빈집 빈집에 감긴 고양이의 눈동자 빈집은 덤불 빈집은 새와 구름 빈집은 당신
글썽이는 입술로 메아리가 사라지는 벽에서 담쟁이가 가느다란 발에 매달려 웃는다
당신이 내민 에코백에 손을 넣어 더듬은 것이 가시덤불과 쥐의 꼬리, 비늘발고둥이 기어다니는 흔들리는 바닥이었을까
가로수의 뭉툭한 줄기가 다시 잘린다 퉁퉁 부은 발목뼈가 어긋난다 어긋날 걸 알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푸석한 얼굴로 빗줄기를 받아내는 길바닥에 아귀처럼 불을 밝힌 심해가 끌려 나온다 수심 이천 미터 암흑에서 금속으로 만든 발을 가진 고둥이 기어 나온다 두 개의 심장이 붉은 심벌즈처럼 부딪치자
무너지는 벽과 일어서는 벽, 흙 비늘을 털고 허물을 벗는 벽과 벗어도 벗어도 두터운 벽, 기대고 있던 벽에 송곳으로 별을 그리자 스크래치라고 중얼거리는 당신이 퇴적층에 쌓인다 밧줄에 걸려 있는 녹슨 칼날들
늪에서 한발씩 빠져나온다 발을 떼면 끈적한 늪의 손 늪의 발이 발목을 감고 질퍽대는 냄새가 가시지 않는다 발목이 따듯해지지 않는다
허기를 감춘 잎사귀가 흔들리고 있다 덩굴손은 금방이라도 손등을 핥을 것 같군 시드는 발화를 쥐고 팔랑이는 손바닥들
우리는 서로에게 뻗어가려는 팔을 안쪽으로 접으면서 걷는다 문틈에서 자라는 울음소리를 들으며 출렁이는 바닥을 트램플린처럼 딛고 통통 튀어 오르며 웃는다 불현듯 해구로 푹 꺼질 때까지
김은닢 시인 / 아름답고 괴상한 나들
오랜 시간 변방을 떠돌아서 너는 변방이 되었구나 사람들 사이에서 옷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개처럼
식당은 고스란히 소음이 된다 음악은 얼굴에서 째깍째깍 돌아가고 목구멍에서 쿨럭이며 올라오지 못한 말들이 잔기침으로 흩어진다
일행이 앉아 있는 탁자에 헐거운 너를 남기고 너는 유리문을 지나간다 나간 너와 사라지는 너를 바라보는 너 개처럼 끙끙거리는 너의 표정이 페이드아웃
아름답고 괴상한 나들 사이엔 다정한 나무가 많지 뭉툭하게 베어지지 않아서 좋다 알고 있니? 잘린 몸통에서 돋아난 가지들은 위쪽으로만 자란다 우리가 심은 목련나무는 뻗쳐오르는 솟대 같아서 그 끝에 흰 날개가 자라고 있지
목련이 밤거리에서 팬플룻을 연주하고 있다 너는 나무와 너 사이에 서서 중얼거린다 너를 모르는 너를 힐끗 훔쳐본다 네가 바닥에서 불쑥 불쑥 튀어오른다 숨을 쉬려고 튀어나온 캄캄한 뿌리들 박스를 열면 튀어 나오는 피에로 모자는 벗어던져 팅팅 용수철 다리로 튕겨 올라 유리 눈알이 팅팅
네가 언제 사라졌지 사라진 게 아니야 원래 하나였던 거지 불온한 네가 박스 속에서 웅크리고 컹컹 짖는다
니스를 칠한 혀들이 숨이 막힌다 탁자 아래로 미끄러진 말들이 바닥에서 우글거린다 너는 거친 껍질을 걸친 나무 사이를 배회하고 있다 너를 묶은 줄을 목에 걸고 까만 개가 걸어가고 있다
김은닢 시인 / 칼데라고 불렀습니다
이름을 부르니까 새로운 세계가 송곳니로 손목을 물며 깨어났다
나의 작은 고양이가 칼데를 끌어당기고 칼데는 나를 끌어당겼지 203동 앞에서 만난 치즈 고양이 너도 본 적 있을 거 야 자동차 배기통 뒤에서 앞발을 핥고 있었지
시계 초침처럼 똑딱거리며 돌아가는 길, 바닥, 바퀴, 칼데,
무엇이든 납작하게 만드는 바퀴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가졌을까 고양이 몸에 달라붙은 길바닥은 눈을 감고 있었을까 바퀴와 길바닥은 고양이로 태어나 살금살금 걸어 다니겠지
수많은 칼데들의 집과 무덤에서 당신과 무심히 산책하다
어디 있니? 칼데 이름 부르게 되면
길바닥이 살랑살랑 꼬리로 대답하는 것 같고 당신의 밑바닥이 거친 혀로 얼굴을 핥아주는 것 같고 낯설고 아름다운 귀를 열고 들어가게 되지
짚어보지 못한 미래가 푹 파이는 것처럼 칼데의 동그란 눈 사라진다
가축과 야생동물 카테고리에 들어가지 않은 살 아남은 가을이 도착한다
층꽃을 단춧구멍에 꽂아주고 싶은 오후 여섯 시, 고양이 눈동자 속에서 넘실대던 것들이 길에 쏟아진다
감각모, 원시 주머니, 센트 박스, 구내염 알약 하나씩 주워서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린다
계속 만지작거리면 지금까지 눈 감고 걸어 다닌 것 같고 꽉 쥐고 있는 너의 주먹을 열어보고 싶고 수요일 저녁엔 분홍코 고양이책방에 가고 싶다
자동차 밑에서 몸을 움츠린 젖은 여름밤이 축축한 털을 털면서 도로를 건너는 중이다 -계간 『문학과사람』 2024년 봄호 발표
김은닢 시인 / 크래커
눈빛이 부서진다 깨지지 않으면 얼마나 굳어지겠니
입안에서 서걱거리는 소리가 끝날 때까지 우리는 서로를 맛있게 와삭 깨문다 풀밭에서 흰주름버섯이 자란다
너도 모자 장수 티파티에 초대받았니 블루엔젤 두 그루가 서 있는 정원에 흰 탁자가 보인다 의자는 세 개 너와 나 사이 삼월 토끼가 졸고 있고 각자의 독백을 즐기는 우리들의 티파티, 접시엔 크래커가 수북이 쌓여있지
네 눈동자를 깊게 쓸어주는 건 내 눈동자에 너를 가두는 거래
측백나무를 오래 바라보는 건 먼 들판을 달리는 거래
눅눅해진 계절을 놓치기 위해 눈썹 없는 얼굴을 그려 볼까
네가 건넨 사금파리 조각에 손목을 깊게 베었어 핏방울이 번지는 들판에 종달새가 튀어오른다
우리의 균열은 길어지는 지평선 우리의 틈에는 푸른 밀밭이 자라는구나
너는 오른쪽 나는 왼쪽 어디에 치약을 놓든 수도꼭지의 물은 쏟아지고
씹는 소리들이 물줄기의 거품으로 빨려들고 축축한 녹말덩어리가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휘파람을 불면 좋겠어
부풀어 오르는 눈빛으로 밀이 익어가는 들판에서
파티는 언제 끝나는 거지? 되돌아온 여섯시처럼 의자를 한 칸씩 바꾼 우리는 제자리로 돌아오고 여전히 크래커는 바삭바삭해
김은닢 시인 / 기척과 불현듯의 어디쯤
정원은 안쪽으로만 자랐습니다 수레국화가 우거진 그늘에 푸른 입술을 감추고 있군요 회잎나무 가지가 시간의 뼈를 늘이며 바닥으로 휘어집니다
오월은 밤마다 검은 향기가 그림자로 따라오는 흰독말풀 같았어요 쾌청한 날씨를 밟고 넘어진 나는 꽃의 자궁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지요 붉은 발자국이 꽃잎에 점점 돋았습니다
이 백색의 방은 무덤 같구나 꽃잎과 꽃대 사이로 사라진 아이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훌쩍 도랑을 건너 뛰어올지도 모를
불현듯 닫힌 정원에서 언니를 기다린 여름이 손끝에 느껴졌어요 구름이 태어나는 한낮과 별자리들이 비틀대며 순환하던 밤,
끝내 언니는 정원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슬픔이 넝쿨처럼 지난 슬픔을 감아올렸습니다
식물들은 꽃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고 나는 흰독말풀 안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계절 밖으로 달려가는 나무들을 보았습니다
뿌리 뽑힌 민들레가 바닥에 노란 꽃을 게워내고 있었어요 발목 없는 나리의 붉은 소리들이 공중에 매달렸습니다
부러졌지만 다 부러지지 않은 꽃대 같은 몸을 흰 그늘에 눕히고
나는 하루를 살았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지나가지 않는
안으로 말린 바람을 뒤집으면 바스라진 잎들이 날렸어요 깊은 밤 적막의 손바닥을 열면 치사량의 독을 쥐고 있었습니다
기척과 불현듯의 어디쯤 바람에게 발목을 휘감기는 저녁
가장 아름다운 것을 잃어버리려고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 도착합니다
김은닢 시인 / 흰 깃발
숲이 톱밥을 게워냈다
전기톱에 잘린 굴참나무 가지들이 꿈틀거리며 꿈속으로 기어들어 왔다
잠들지 못했다 산벗나무 층층나무의 펄떡이던 숨소리들 푸른 심장에 서늘한 칼날이 파고들었다
절벽을 울리던 먼바다 물결 소리 사라졌다
나를 둥글게 안아주던 숲 불현듯 나를 털어버리는 숲 영영 내가 버린, 버려질 숲
숲 가장자리에 꽃힌 흰 깃발들
붉은 살이 드러난 절개지에서 달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새들이 울고 있다
팔다리 잘린 채로 나를 출산한 숲 나는 매달릴 나무도 없이 미아로 자랄 거다
내 목소리가 나무 속으로 잠겨 들었다 주먹을 그러쥐었으나 쪼글쪼글 물기 잡힌 손이었다 돌멩이 하나를 쥐었다가 떨어뜨렸다
절름발이 새가 옆에서 날아가지 않았다
-계간 『시하늘』 가을호 수록 신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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