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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경숙 시인 / 꿈꾸는 정원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9.
황경숙 시인 / 꿈꾸는 정원

황경숙 시인 / 꿈꾸는 정원

 

 

바람의 춤에서 태어난 생명들이여

어서오라

함께오라

마음이 이끄는 길을 따라

오래고도 새로운 시간이 흐른다

 

내안의 나를 만나는 춤추는 정원

 

신중하게 조율한 피아노 건반 같은 돌담의 연주가 시작되면

새들은 노래하고

꽃과 나무들은 춤춘다

3월과 4월의 환희

5월과 6월의 황홀

그리고 여름 가을 겨울

또 다시 새로운 봄이 오면

이윽고 세상에 처음 온 빛이 정원을 어루만진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을 존중하며

지금 나의 삶을 사랑하며

나는 춤춘다

우리는 춤춘다

그 어떤 걸림도 없는 몸과 마음이여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그러한 영혼들!

 

감사와 축복이 충만한 정원에서

꿈꾸라 내일을,

행복하라, 지금 이 순간을

 

어서오라

함께오라

춤추는 정원으로!

 

 


 

 

황경숙 시인 / 버찌

 

 

사라지는 것들의 흔적은 붙잡을 수 없어

 

잘 익은 버찌를 깨문 입술

슬픔의 징후는 슬픔의 직전에 이미 뿌리가 있어

미사시간 복사를 보는 소년처럼

가만히 저녁이 오는 골목에서

사춘기를 앓을 때의 저주처럼 기도를 해

 

회색빛 원피스가 맞춤이던 뒷모습을

빛이 사그라질 때까지 눈으로 되새김질해

그때 버찌는 익을 만큼 익어서 피눈물을 뚝뚝,

 

텅 빈 골목

그림자가 남겨 준 바람의 눈동자 속에

씹지 않고 삼킨 까만 버찌

벚나무 등걸처럼 가슴에 옹이 맺힌

 

버찌가 익을 무렵

 

사라지는 것은

직전에 감당 할 수 없을 만큼의

짧은 봄 같은

순간,

그때의 봄을 놓치지 않아

 

버찌가 익을 무렵이면

 

 


 

 

황경숙 시인 / 시치미 품다

 

 

 천장대 라마승이 던져주는 살덩이를 먹고 살던 독수리 형제

 

 첫아이 울음이 달팽이관을 돌아 탯줄을 자른 후에도 산모는 산통을 느꼈다. 자궁 속에 시치

미를 떼어 놓은 둘째 아이의 탯줄은 쉽게 잘리지 않았다. 목에 탯줄을 친친 감고 아홉 개의 목숨을 가진 고양이 사주를 가진 아이. 어미의 품에서 나락 같은 긴 숨을 내쉬었다. 첫이레를 넘기지 못하고 마지막 울음이 바위 속으로 스몄다.

 

 아이를 입양하고 입열기떡을 나눈 몇 달 뒤에서야 말을 잃어버린 것을 알았다. 처음 안았을

때 가슴을 찌르는 냉기가 느껴졌다. 언 가슴을 떼어 놓고 돌아온 며칠 밤을 바윗덩이가 가슴을 짓누르는데 두근두근 숨소리가 들렸다. 가위에 눌려 일어 난 아침 차갑게 굳은 아이를 다시 품었다.

 

 마애불 앞에서 아이의 목소리를 듣는다.

 천 년 전 새겨 놓은 말을 바위가 품고 있다.

 높이 떠서 정지비행 하는 독수리 한 마리

 

 


 

 

황경숙 시인 / 외연도

 

 

외연도(外烟島), 서쪽 바다 멀리 안개 잦은 작은 섬.

그곳에 숨겨진 작은 울림들이 조용히 세상 빛을 기다린다.

차르락 차르르

큰몽돌 작은몽돌들이 내는 울림,

휘이잉 스르르

온몸에 부딪쳐오는 2월 섬바람.

노을집 주인은 돌아온 그 섬에서

비워진 마음으로 노을과 바람소리와

커피향을 따뜻하게 나눠주었다.

적막 가득 인적 드문 섬 안엔

푸른 상록수림과 붉디붉은 천년동백이

오래도록 피고지며

그 섬을 지키고 있었다.

 

 


 

 

황경숙 시인 / 가을의 속삭임

 

 

바람에 일렁이는 은빛 억새가

눈부신 조명을 받으며 가을을 맞이한다.

 

하늘거리는 깃털의 감미로움이

억새의 항해로 노저어가고

가을로 걸어가는 길가에는

오색향연에 폭죽 소리 높아만 간다.

 

서서히 물들어가는 단풍의 붉은 마음은

새색시 첫날밤의 설레임 같고,

노랗게 익어가는 은행의 열매는

영글어가는 우리네 마음이 되어버렸다.

 

다가오는 이 소리에

너와 나

그리고 우리네 모두가 하나 되어

소리 없이 이 가을을 영글고 있다..

 

 


 

 

황경숙 시인 / 프로타쥬

 

 

 눈꺼풀이 내려지고 푸른 동공이 닫히기 전에 나는 네 얼굴에서 데스마스크를 뜬다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블루 빛 염색을 하고 손톱 발톱에 검은색 매니큐어로 날개를 그리고 너를 따라 날아오르는 내 얼굴 아직 가면은 아니다

 

 내일 아니 오늘 이미 자란 너의 아이를 낳고 코르셋 끈을 조이면 허리가 잘록해지므로 나는 다시 태생의 물병자리에 꽂혀 물구나무선 채 너를 만날 수 있다

 

 짧지만 여전히 날 선 말들로 내 물음에 대답하는 너는 모래시계 속의 블랙홀에 갇혔다 빠져나오기를 반복한다

 

 얼굴에 흰 종이를 대고 연필로 긁고 긁으면 꿈속에서 접은 종이인형처럼 뻔뻔한 네 윤곽은 살아날 듯 꿈틀거린다

 

 너와 내가 닮은 유일한 언어가 뒷모습뿐이라는 생각이 들 때 과거와 현재 사이에 너라는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삶의 천극(川劇)이 거꾸로 흐르면 내 시(詩)의 변검(變瞼)*은 언제 네 얼굴을 떼 낼지 모른다

 

* 중국 쓰촨성(四川城) 고유의 경극으로서 일종의 가면놀이. 천극(川劇)이라고도 함.

 

 


 

 

황경숙 시인 / 해리성 기억상실증

 

 

 숨은 샘을 찾아 늦가을 천은사(泉隱寺)를 헤맸다

 소지(燒紙)의 재로 용(龍)의 눈을 마지막으로 닦아주는 일곱 번째 이렛날에야 마른 계곡 안쪽에서 아쿠아마린 빛 소(沼)를 찾았다

 측백나무 잔뿌리와 단단한 흙을 비집고 막 걸어 나온 듯 스러졌다 돋아나고 돋았다 스러지는 여러 개의 크고 작은 입을 감아 돌리는,

 

 소용돌이치는 발아래 하늘 속으로 빨려 들면서 아버지 목탁소리를 들었다

 

 내 기억이 오리온자리에서 왼쪽으로 가는 길을 잃었다고 차트에 씌였다

 넘어져 깨진 무릎에 옻 단풍이 들었지만 다행히 밝은 별 하나는 손에 꼭 쥐었으므로, 놓친 여섯 개의 별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처방전이 천정에 붙여졌다

 셀 수 없는 많은 말들이 파장을 일으키며 입 안을 빙빙 잡아 도는 날들이 왔다

 도마뱀꼬리처럼 끊어버린 내 시간 속에는 새로운 꼬리표가 생겨나지 않았다

 

 기억상실증이란

 퍼내지 못한 말들이 까맣게 물들어가는 먹감 빛 간절함,

 그 구겨진 말의 발들이 어둠 밖으로 달려 나오며

 모서리에 홀려 구르기도 하고 뿌리 뽑힌 측백나무가 움켜쥔 허공에

 때 이른 용설란을 피워낼 때까지의

 큰 보폭

 

 가까운 타인 같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쫓겨 다니지 않아야 한다고 소리치며 바람을 만졌으나 흩어지며 사라진다

 어긋나지 않으려면 당신을 비켜서지 않아야 한다

 

 버리지 못한 말들이 오래 숨겨져 있던 물 속으로 가라앉을 때 갓 태어난 아이처럼 울어야 하는 많은 날들은 앞에서 뒤로 오는 것이다

 

-<시인시각> 2010 봄호에서

 

 


 

황경숙 시인

전남 여수 출생. 2009년 《애지》 겨울호에 무드셀라 증후군 외 4편의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 시작. 시집 『그린란드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