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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무산 시인 / 물의 일생
제주공항에 내려 목이 말라 가방에서 생수병을 꺼내 마른 목을 축이고 보니 한라산 상표가 그려진 삼다수다
물은 청계천 철공소 골목 작은 슈퍼에서 칠백원 주고 산 것이다 여기 공항에서 지척인 제주시 조천에서 퍼올린 물이다
배에 실려 육지로 나가 다시 차를 몇번 바꿔 타고 등짐에 몇번 실려갔다 다시 비행기를 타고 왔다 내가 지불한 돈은 물값이 아니라 석유값이다
물은 순환하고 유전하는 거라 용케 돌고 돌아서 제자리에 왔다 물은 물의 길이 아니라 사람의 길을 따라 일생을 마쳤다 흐르고 증발하고 스며들고 적시며 다시 흘러오던 것이 안전한 병에 담겨 한방울도 흘리지 않고 한방울도 더하지 않고 아무것도 적시지 않고 돌아서 왔다
삶의 여정도 그렇게 흘리지 않고 적시지 않고 스며들지 않고 안전하게 담겨 오기를 열망한다 땀은 석유값으로 지불하고 삶은 병 속에 갇힌다
먼 길 돌아 흘러온 듯하지만 이 물은 떠난 적도 없고 살았던 적도 없다 뚜껑을 열어 비로소 마취에서 깨어나기 전까지
백무산 시인 / 손님
내가 사는 산에 기댄 집, 눈 내린 아침 뒷마당에 주먹만한 발자국들 여기저기 어지럽게 찍혀 있다 발자국은 산에서 내려왔다, 간혹 한밤중 산을 찢는 노루의 비명을 삼킨 짐승일까
내가 잠든 방 봉창 아래에서 오래 서성이었다 밤새 내 숨소리 듣고 있었는가 내 꿈을 다 읽고 있었는가 어쩐지 그가 보고 싶어 나는 가슴이 뜨거워진다 몸을 숨겨 찾아온 벗들의 피 묻은 발자국인 양 국경을 넘어온 화약을 안은 사람들인 양 곧 교전이라도 벌어질 듯이 눈 덮인 산은 무섭도록 고요하다
거세된 내 야성에 피를 끓이러 왔는가 세상의 저 비루먹은 대열에 끼지 못해 안달하다 더 이상 목숨의 경계에서 피 흘리지 않는 문드러진 발톱을 마저 으깨버리려고 왔는가 누가 날 데리러 저 머나먼 광야에서 왔는가 눈 덮인 산은 칼날처럼 고요하고 날이 선 두 눈에 시퍼런 불꽃을 뚝뚝 떨구며 그는 어디로 갔을까
백무산 시인 / 수수꽃다리 다섯그루
아이들 부축을 받으며 노인이 돌계단을 밟고 암자로 올라왔다 어린 손자의 가슴엔 할머니 영정이 들려 있었다.
마당가에 아름드리 오동나무가 보이자 핏기 없던 노인의 얼굴이 상기되면서 가만히 나무를 올려다보다가 두 팔로 한참을 꼭 껴안아도 보다가
목을 쑥 빼고 담장 너머 뒷산을 바라보다가 산 너머 구름을 올려다보다가 뻐꾸기 우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생각에 잠기다가
으스름 뒷산에서 총성이 울린 건 노인의 젊은 시절이었다 다급하게 청년이 숨어든 곳은 마을 외딴집 눈이 먼 애기무당이 홀로 법당을 지키고 사는 집이었다 애기무당은 그를 곁방에 숨겨주었다
밤이면 산으로 갔다가 첫닭이 울기 전에 돌아오고 낮엔 숨어지내다 어느날 건넛산에 불길이 솟고 총성이 요란하더니 청년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동짓달에 애기무당은 혼자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 다섯살 무렵에 청년이 돌아왔다 청년은 애기무당을 데리고 마을을 떠났다
그 법당 자리에는 새 법당이 지어졌고 곁방이 있었다 노인은 그 곁방을 들여다보고 문지방에 앉아도 보았다 할머니 영정을 안은 아이를 앞세우고 마당을 한바퀴 돌고는 가죽나무 그늘 고샅길 돌아가면서 몇번이고 뒤돌아보았다
그때 그 곁방에 숨어지내던 나도 암자를 떠난 지 십수년이 지났다 그 시절 내가 심은 수수꽃다리 다섯그루는 얼마나 자랐을까
백무산 시인 / 인류세
폭염에 마스크를 쓰고 불판 아스팔트를 걸어 쥐약을 사러 갔다
한동안 비워둔 허술한 집이긴 하지만 쥐들이 갑자기 불어나 거실에까지 제집처럼 극성이어서 먹으면 눈이 멀어지고 소화도 시키지 못해 밝은 곳으로 기어 나와서 죽는다는 새로 나온 쥐약이라곤 하지만,
마당엔 개도 있고 너구리도 다니고 꼭 그래야 되나 싶기도 해서 뚜껑도 열지 않은 채 다락에 던져두고 허술한 곳 손을 보고 더 두고 보자 했는데 어느 날 극성이던 것들이 종적을 감추었는데
쓸모가 없어진 위험한 쥐약 버리려고 찾았더니 봉지가 찢기고 빈 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이빨 자국에 뚜껑은 몽땅 뜯겨져 있었고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 지경에 많이 먹겠다고 행패 부린 놈 배불리 먹고 떠났을 테고 못 먹은 몇몇은 어쩌면 자책에 시달리다 다 버리고 떠났을지도 모른다, 쥐가 자책을?
인간 전유물 같은 소리 하지 마라 자책을 모르는 생명이 여태 멸종 않고 살아남을 수는 없잖는가 자책도 그저 반사신경의 일종일 것 그러니 너무 자신을 탓할 것 없어 너희들이 우리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테니까
그런 일쯤이야 이곳에는 이미 너무 흔해빠진 일 저 거대한 뚜껑 찢어발긴 우리들 좀 보아 저 빈 병에 무엇이 들어 있나, 창세기가?
-『내일을여는작가』 2022년 하반기호)
백무산 시인 / 너를 쬐어야 한다
타는 볕을 쬐어야 하고 언 바람에 피를 식혀야 한다 그래야 살 수 있다 나는 변온동물이기 때문이다
내 피는 식었다 뜨거웠다 한다 세상 사정은 내 심장에 들어오고 나간다 기쁨을 쬐어야 하고 슬픔도 일용할 양식이다 먼 곳의 눈물과 환호도 내 간 속으로 들어오고 나간다 어두운 곳의 절규와 더러운 곳의 축제도 나의 폐부를 할퀴며 들어오고 나간다 내 몸에는 항온을 유지할 두꺼운 비곗덩이가 없다 내 살은 구리처럼 전도율이 높아 슬픔도 바람도 골수에 바로 전한다 나는 너무 뜨겁고 너무 차갑다
그래서 종종 내 주체가 피부에 있는지 심장에 있는지 뇌에 있는지 더 깊은 곳에 있는지 모를 때가 있다 어쩌면 몸 밖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지만 상관하지 않는다 인간을 유지해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렇게 생각할 때만 내가 인간인 것 같다 항온을 유지할 만큼 나는 나를 책임지지 못한다 오랫동안 심장이 뛰지 않은 채 한곳에 머물렀던 적도 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사정이 나를 해체하는 건 아니다. 나의 심장에 햇볕도 기쁨도 소용없을 때가 있다 오직 너를 쬐어야만 할 때가 있다. 먼 대륙의 바람이 심장을 자주 달구었지만 나는 떠날 수 없었다 너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너의 체온이 나의 체온이므로 낮고 어두운 곳에서 울고 있는 너 때문에 너의 차디찬 피가 멈추었던 내 심장을 뛰게 했으므로
백무산 시인 / 참수
네윈 이울스름(26)은 터키에 사는 두 아이의 가난한 엄마 남편이 멀리 일하러 가고 집을 비울 때면 이웃사는 친척 누렛던 기데르(35)가 그녀를 성폭행하고 학대했다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 반항하는 그녀에게 사진을 찍어 협박하고 아이들 목을 칼로 위협하기도 했다 그날도 남자가 담을 넘어오고 있었다 여자는 아버지의 총을 들고 나와 쏘았다
이울스름은 분이 풀리지 않았다 맨발로 거리에 나갔다 모여서 빈둥거리던 남자들에게 다가갔을 때 그녀를 보자 남자들은 또 낄낄거렸다 여자는 남자들 가운데로 뭔가를 집어던졌을 때 모두 뒤로 나자빠졌다 남자의 머리통이었다 여자는 말했다 “내 뒤에서 수군거리지 마라 내 명예를 우습게 여기지 마라!"
수군거리는 자들 가운데 머리통을 던졌다는 기사 대목에서 몇 번이고 내 가슴에 불이 활활거렸다
우리는 더러운 체제의 목을 베어 광화문 네거리에 내던지고 싶었지만 우리도 그 더러운 체제에 목을 담그고 있었다
난 어두운 곳으로 와서 眼耳鼻舌身意 내 모가지를 참수하여 거리에 내던지려고 바위를 갈고 또 간 일이 있었다
백무산 시인 / 호모에렉투스
타이어를 껴입고 배를 깔고 바닥을 기며 구걸하던 걸인이 비가 오자 벌떡 일어나 멀쩡하게 걸어가는 모습에 어이없는 배신감을 느낀다지만
상인에게 상술은 문제 삼지 않으면서 걸인에게 동냥의 공정거래를 요구할 참인가 정치꾼들의 쇼는 전략이라는 건가
사지 멀쩡한 놈이라고 혀를 차지만 사지 멀쩡한 거지가 없는 세상이라면 모를까 구걸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라면 구걸 가운데 어떤 구걸이 도덕적인가
비참해야 하는데 덜 비참한 것이 문제였을 것 발밑에서 계속 기어야 하는데 머리를 쳐들었기에 혐오가 생겼을 것 고귀하고 선한 본성에 상처를 입혔다는 건가
머리가 땅에 닿도록 굽신대며 표를 구걸하고 신분을 위장하고 머슴입네 간을 빼줄 듯이 가난한 자의 발바닥이 되겠다던 정치인들의 계급 위장은 고상한 전략인가
생존을 위해 직립을 포기해야 하는 사람들이 그들뿐인가 진화를 교란하고 기적을 연출하는 인간들이 그들뿐인가
배를 깔고 바닥을 기다 멀쩡하게 일어나는 기적과 숙였던 고개와 바닥에 깔았던 신분을 벌떡 일으켜 세우고 거만한 지배자가 되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도덕적인 기적인가
-시집 <페허를 인양하다>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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