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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호 시인 / 정거장에 간 사람
정처 없이 걷는, 저는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는 보행자처럼 저에게도 목적지가 있습니다 부모님께 잘 다녀오겠다는 인사도 하고 지도도 챙기고 물병도 두 개나 챙겨서 집을 나섰습니다
저는 매일 정거장에 갑니다
목적지에 가려고 버스를 타는 사람들과는 사뭇 다르게 이웃집 사람을 욕하면서도 매일 이웃집 사람을 만나러 가는 우리 할머니의 마음과는 어딘가 비슷하게,
저는 서성일 목적으로 정거장에 갑니다
여러분도 한번 와보셔요 정거장은 서성대는 사람들의 회관입니다
정거장에는 도달하려는 곳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로 붐비고 그 곳에서 저는 유일하게 도달한 사람이 되어봅니다
정거장에 가면 초조한 표정이 이상하지 않고 멈춰선 것이 이상하지 않고 더 먼 곳을 가기 위한 사람 같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남자 같고 내일도 마주칠 사람 같습니다
그러나 눈앞에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도로가 있고.
사람이 살지 못하는 도로는 강물 같습니다 두 발로 서 있을 수 없는 그런 강물 같습니다
챙겨온 지도와 물병 하나를 꺼내 지도에 그려진 도로를 물로 칠해봅니다 그럴수록 강물은 늘어나고 이재민이 늘어만 가고 이재민이 불어난 강물을 보듯 저는 도로를 바라보았습니다
환자를 싣지 않은 구급차가 정거장을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구급차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묻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남은 물병 하나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칠일입니까?
저는 여태껏 한 방울의 물도 마시지 못 했는데 이렇게 며칠을 지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정거장을 지나치는 행인에게도 저는 발견되지 않을 겁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저는 이 정거장에 가장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처 없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의 정처는 인적이 드믄 종점이기 때문입니다.
김광호 시인 / 이 어둠이 자궁 속이라면 좋겠네
소년은 몇 년 째 기지개를 켜지 않는다
빛을 막아서는 커튼은 주름이 접힌 채 절벽처럼 서 있다 출입을 막아서는 방문에는 손잡이가 없다 시계는 벽에 목을 매달고 죽어있다 소년은 시계의 건전지를 거꾸로 쑤셔 넣고 죽은 시간을 거슬러가는 중이다 소년은 숫돌에 갈린 듯한 날선 눈으로 어둠을 베어내며, 깊숙한 소년의 창세기를 향해 가는 중이다
어둠 속을 막 빠져나온 태아의 탯줄이 끊긴다 태아는 썩은 동아줄을 잡고 떨어지는 짐승처럼 울부짖는다 다시 되돌리고 싶은 마음을 거꾸로 세워 때린다 푸른 멍이 은밀한 부위에 새겨진다 태초의 말을 지우려는 듯 울음과 괴성을 철자로 하는 말을 잠재운다 풍만한 젖가슴으로, 혼동의 젖꼭지로, 돌지 않는 초유로, 침묵의 순간으로. 소년은 거의 도착하고 있었다
벌어진 어둠 속으로 끊어진 탯줄을 타고 기어들어간다 쉽게 허락되지 않는 어둠 속으로, 감출수록 깨끗해지는 어둠의 상징으로, 성모의 그 곳으로. 소년은 최대한 깊숙이 밀어넣는다 하얀 밤을 사정하던 자정에, 자정의 언어로 쓴 짧막한 쪽지를.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자궁을 주세요 어둠이 순수의 상징이라 믿을 수 있는 고통이 창조의 생리라 믿을 수 있는 소녀들이 살아가는 밑천 같은 자궁을.
밋밋한 가슴이 부풀고 방안에는 태초의 빛이, 막막한 커튼을 뚫고 들어온 한 줄기 빛이. 침대를 벗어나 축 늘어진 손에 와 닿는다
손을 둥글게 말아 둥근 어둠을 만든다 둥근 어둠 속으로 빛이 들어서자 남자는 주먹을 불끈 움켜쥐고 자작나무 가지 피듯,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어둔 숲의 자작나무*는 백야의 수피를 두르고
* 자작나무의 꽃은 자웅동주로 4~5월에 핀다. 오월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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