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그루 시인 / 구두 당신이었습니다 파출소 안에서 건너편 담뱃가게를 활시위 떠난 사람처럼 바라보고 있던 모습이 흙먼지를 훑고 지나온 듯한 밤색 양복에 검정 고무신 탑새기 같은 반백의 머리 당신이었습니다 동네에 양복점 생기고 너도나도 양복 한 벌 맞춰 입을 때 마지막까지 망설이다 맞춘 양복 입고 처음 간 곳이 파출소라니 누나가 단골 미장원에서 돈을 훔쳤다고 했습니다 양복에 신을 구두가 없어 검정 고무신 신고 젊은 순경 앞에서 연신 머릴 조아리던 당신이었습니다 늦은 밤에 돌아와 마른 세수를 하며 아침엔 괜찮았는데 고무신이 헐떡거린다고 하시던 그때 다짐했습니다 이 담에 돈 벌면 제일 먼저 삐까뻔쩍하게 광나는 구두 사드리겠다고 첫 월급 타서 산 검장구두가 당신과 발 한번 맞춰보지 못하고 먹물 같은 시간 속에 엎드려 있습니다 -계간 『시와산문』 (2025년 봄호)
김그루 시인 / 도라지 미용실
장마가 시작되면 읍내 미용사는 닭뼈 같은 롯드와 가위 서너 개 그리고 파마약을 챙겨와 부녀회장 댁 대청마루에 간이 미용실을 차렸다 동네 여자들은 아침나절 부리나케 뒷산에 올라가 도라지를 캐와 까면서 머리를 말았다 앞으로 고꾸라지는 머리를 미용사가 연신 밀어 올리며 머리를 뽂는 동안 깐 도라지는 막 시집 온 그녀들처럼 뽀얬고 도라지 진액으로 물든 손끝은 식은 보리밥처럼 검었다 며느리가 자꾸 밥 안 준다며 도라지 껍질을 먹는 치매 걸린 양순이 할머니를 밀쳐두고 역한 파마약 냄새에도 그녀들의 웃음소리가 외양간 새끼 밴 소의 배에 가 닿아 배가 움찔움찔 하기도 하였다 저녁나절 그녀들의 머리는 하나같이 풀리지 않는 가난처럼 뽀글뽀글했지만 뒤에서 보면 다 예쁜 그녀들이었다
지금은 긴 장마에도 뒷산 도라지꽃만 한갓지게 피고 진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이종만 시인 / 밤의 무게 외 1편 (0) | 2026.02.09 |
|---|---|
| 김희업 시인 / 공 외 1편 (0) | 2026.02.09 |
| 권순해 시인 / 염불암 외 1편 (0) | 2026.02.09 |
| 나혜경 시인 / 난동暖冬 외 1편 (0) | 2026.02.09 |
| 민왕기 시인 / 문병 다니는 일 외 1편 (0) | 2026.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