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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민왕기 시인 / 문병 다니는 일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2. 8.
민왕기 시인 / 문병 다니는 일

민왕기 시인 / 문병 다니는 일

 

 

요즘 뭐 하며 지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그저 문병 다닌다고 한다

 

병이 온 첫날엔 참이슬 서른 잔으로 안부를 물었고

일주일 되던 날엔 맥주 두 병으로 문안을 했다

 

달포가 지났을 땐 맥주 서너 병으로 인사를 다녀오고

무슨 병인지 모를 만큼 시일이 지났을 땐 술 석 잔 붓고 말았지만

 

오랜 병을 구하려는 일도 줄어 가끔 맥주 한 병 사다가

입술에 닿는 거품들을 후루룩 소리내어 들이켜 보기도 한다

 

사람 만나러 가는 길이 이제 다 지인들 문병 가는 일이다

 

아파 보이는 사람이나 아파 보이지 않는 사람들 모두

소주나 막걸리 같은 것을 놓고 앉아서 제 속에 술 털어 넣는일

 

그저 산책하러 가는 길에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

밥 한 번 먹자는 말도 모르는 병을 서로 조용히 묻자는 이야기다

 

-『시사사』 2023-여름(114)호

 

 


 

 

민왕기 시인 / 목 좋은 곳에 집을 얻어서

 

 

일주일에 한 번은 반드시 내 창문 아래로 우는 사람들이 온다

 

분노로도 안 되고 자책으로도 안 될 때 그렇다고 죽지도 못할 때

소리치기 좋은 자리를 골라 많은 말을 하고 간다

 

나는 다 듣는다 본디 내 말이었던 혀가 꼬인 말들을

 

매번 다른 사람이 오는 데 매번 비숫한 말을 하고

처음엔 화내다가 나중엔 모두 울고 간다

 

애인은 슬픈 일이라고 하지만 저 말들에 나를 섞어 떠나보내는 거

목 좋은 곳에 집을 얻어 일주일에 한 번은 속으로 같이 소리치곤 한다

 

생계와 관계와 사랑이 저를 치고 갔을 때

술 취한 마음은 또 얼마나 용기 있는 것이었나

 

품위를 말하는 사람이 싫고 위선이 보이는 사람이 싫고

오직 저런 난동 위에서 뼈다귀만 남은 마음만이 가여운 구원을 얻는다

 

울기 편한 귀퉁이에 집을 얻어

꽁꽁 언 겨울에도 눈물 흘리는 사람들 들러가니

 

여기는 사시사철 울음이 풍성한 곳, 울음이 풍요로워 떠나지 못하는 곳

 

-『시사사』 2023-여름(114)호

 

 


 

민왕기 시인

1978년 강원도 춘천에서 출생. 단국대학교 영어영문과 졸업. 계간 《시인동네》 2015년 가을호에 〈고래〉 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아늑> <내 바다가 되어줄 수 있나요>. 前 《강원일보》 문화부·정치부 기자, 기자협회보 기자. 현재 《뉴스1》 기자로 재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