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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 단골집
노을이 붉은 신호등을 켰다 한 집 건너 한 집 빼곡하게 들어앉은 가게마다 흔들리는 불빛, 골목과 골목 저 건너 전신주 아래 한자리에서 몇십 년 성황당 처럼 앉아있는 단골 가게, 간판 한 번 바꾼 일 없는 찾는 물건이 없을 때가 더 잦은 좁아터진 점방, 시장가는 발을 멈추게 한 것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철마다 다른 모습의 푸성귀들, 젊은 부부, 그들의 부모님이 손수 심고 다독이며 농사지은 햇양파, 햇감자, 햇고추, 곶감, 한여름 머리 위 땡볕을 고스란히 제 안에 품은 햇것들
얼마 전, 태양초를 달라는 말에 부부는 - 미안합니다. 어머님이 연로해서 더는 농사를 지을 수가 없네요... 점방을 닫아야 할 것 같다고 한다
없는 것을 떠올리는 대신 이미 가진 것을 잃는 일 더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더 나쁜 일이 안 생기는 것 손쉽게 행복을 얻는 공식이다
지금, 당신의 단골집은 안녕하신가요?
문현숙 시인 / 배추흰나비의 비행 -내일로*
슬픔을 억누르며 찬찬히 걸어오는 말 겨우내, 움츠렸던 가지는 어딜 향해 달려갑니까 청해진 궤도에 순응할수록 넓은 들판이 유순해집니다
황홀한 진입을 꿈꾸었는데 울컥, 거친 호흡을 내쉬며 고개를 넘어갑니다
더 빨리, 좀 더 빨리 내릴 곳을 놓아버린 우린, 간이역을 벗어나 가끔, 청춘의 건널목 표지판을 지나치듯 저마다의 적정속도를 찾아 헤매기도 합니다
깊은 우물에 빠져, 아직은 동면에 든 애벌레 곧, 초록의 허공을 비행할 봄의 배추흰나비
안부를 담은 전언은 다음 역에 잘 도착하겠지요
정차와 연착을 견뎌낸,길고 긴 시간의 정거장 깊은 동굴에 매달린 일상을 뒤로하고
동해안을 가로지르는 내일로에 오를 또 다른 내일들, 다음 정거장은 봄날역입니다
*내일로 티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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