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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정오 시인 / 수신修身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3. 1.
이정오 시인 / 수신修身

이정오 시인 / 수신修身

 

 

같은 높이의 허공을 조롱조롱

까맣게 수놓고 있는 포도송이를 본다

경작하지 않으면

야생의 숲이 되는 대지

 

네가 서 있던 포도넝쿨 아래

뒤돌아서면 일어서던 고랑의 풀

그 풀을 나는 묵묵히 뽑고 또 뽑았다

풀을 뽑는 일은 시름을 꺾는 일

부지런히 갈고 닦아야

내 어둠을 물리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풀을 매고 나니

멀리서도 보이는 네가 있어 고맙다

풀이 대지의 젖꼭지를 빨 듯

찰싹 허공의 젖줄에 혓바닥을 대고 있는

맑고 깊은 네 존재의 심연

그곳에서 천천히 환한 달하나 솟아오른다

 

외로운 사람 곁에

행복한 풍경으로 남고 싶은 포도밭 한가운데

네가 있어 내 연못 속에도

고요가 숨쉰다

 

 


 

 

이정오 시인 / 고요한 풍경화

 

 

봄이 오는 길목

불쑥

거인의 아침이 깨어난다

비닐하우스에서

겨울잠 자던 트랙터가

밖으로 나온다

 

빈들로 가는 트랙터 운전석

모자 눌러쓴 수염 덥수룩한 사내가

굽은 논둑길을 바라본다

막 겨울을 빠져나온 사내의 골목길

아직 울퉁불퉁하다

 

사람 키보다 큰 바퀴가 봄을 굴린다

봄의 거인

길에 한 숟갈 한 숟갈 홈을 파며

사내의 겨울을 갈아엎으러

천천히

농로를 따라 간다

 

논두렁 사이 마른 갈대

쓱쓱 흙을 털며 일어선다

야윈 칼바람에 휘파람을 분다

머지않아

새싹을 틔울 모양이다

 

 


 

이정오 시인

충남 예산 출생. 아주대학교 영어영문과 졸업. 2010년 계간《문장》 신인상 을 통해 등단. 시집 『달에서 여자 냄새가 난다』 『층층나무편의점』 『살판』. 안성문화연구소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