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오 시인 / 수신修身
같은 높이의 허공을 조롱조롱 까맣게 수놓고 있는 포도송이를 본다 경작하지 않으면 야생의 숲이 되는 대지
네가 서 있던 포도넝쿨 아래 뒤돌아서면 일어서던 고랑의 풀 그 풀을 나는 묵묵히 뽑고 또 뽑았다 풀을 뽑는 일은 시름을 꺾는 일 부지런히 갈고 닦아야 내 어둠을 물리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풀을 매고 나니 멀리서도 보이는 네가 있어 고맙다 풀이 대지의 젖꼭지를 빨 듯 찰싹 허공의 젖줄에 혓바닥을 대고 있는 맑고 깊은 네 존재의 심연 그곳에서 천천히 환한 달하나 솟아오른다
외로운 사람 곁에 행복한 풍경으로 남고 싶은 포도밭 한가운데 네가 있어 내 연못 속에도 고요가 숨쉰다
이정오 시인 / 고요한 풍경화
봄이 오는 길목 불쑥 거인의 아침이 깨어난다 비닐하우스에서 겨울잠 자던 트랙터가 밖으로 나온다
빈들로 가는 트랙터 운전석 모자 눌러쓴 수염 덥수룩한 사내가 굽은 논둑길을 바라본다 막 겨울을 빠져나온 사내의 골목길 아직 울퉁불퉁하다
사람 키보다 큰 바퀴가 봄을 굴린다 봄의 거인 길에 한 숟갈 한 숟갈 홈을 파며 사내의 겨울을 갈아엎으러 천천히 농로를 따라 간다
논두렁 사이 마른 갈대 쓱쓱 흙을 털며 일어선다 야윈 칼바람에 휘파람을 분다 머지않아 새싹을 틔울 모양이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오광석 시인 / 신기루 마을 외 1편 (0) | 2026.03.01 |
|---|---|
| 양은숙 시인 / 녹색 바람 외 1편 (0) | 2026.03.01 |
| 윤진화 시인 / 일식 외 1편 (0) | 2026.03.01 |
| 김삼환 시인 / 막간 외 1편 (0) | 2026.03.01 |
| 이명 시인(안동) / 산중의 달 외 1편 (0) | 2026.03.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