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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화 시인 / 일식
중대부속 용산병원 길 건너 24시간 편의점이 있어요 나는, 깡통으로 포장된 백도白道, 황도黃道를 보며 달이 지금 어디쯤 가고 있나를 생각하고 그 속에 들어가 진줏빛 코로나를 마시지요 카운터의 소형 텔레비전에서는 흑백영화가 한창이에요 영화 속 십자가를 짊어진 사내는 가파른 언덕을 오르고 있어요 통유리 너머 보이는 공사장, 일일 잡역부도 월계관 수건을 머리에 두른 채 아슬한 구조물을 타고 있어요 그 위에는 태양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어요 태양이 두 사내의 팔뚝에 솟아오른 전선을 따라 그들을 붉게, 붉게 물들여요 편의점 문짝이 바람에 꺼덕이는 동안 아버지의 위급을 알리는 남동생의 목소리도 전선을 타고 물들어가요 24시간 편의점 불빛을 보며 맥주가 피식, 피식, 김빠진 웃음을 지어요 깡통 속에서 부풀어오르는 달을 봐요 유통기한을 훨씬 넘겨버린 차가운 달 가야 할 길을 읽어버린 저 달을 들어 고열에 시달리는 태양을 조심히 가려봐요
윤진화 시인 / 신이 다니는 길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 앞에서 파란불을 건너 가다 보면 갈월동 시민의원이 나올 거야
영(靈)들이 드나들던 곳이야 피를 뽑힌 후, 흰 국화 같은 얼굴로 이곳을 오가던 귀신들
시민의원이라 걸린 목판에서 투명한 얼굴들이 보여 그들을 따라 둥근 무덤을 얹은 서울역으로 걸어
소주 한 병 북어 한 마리 놓고 절하고 또 절하고 또 절하고 제 무덤 앞에서 쓰러지지
흰 꽃들은 무덤을 향해 두는 거야
사람의 길과 신의 길 한 뼘 차이인데 피를 주고 누구는 귀신이 되고 피를 마시고 누구는 겁에 질려서 굴러다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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