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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여정 시인 / 아니,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2. 28.
여정 시인 / 아니,

여정 시인 / 아니,

 

 

 인자는 내 애인의 이름이다. 아니, 인자는 디아블로 게임의 내 캐릭터 이름이다. 인자는 지금 절망의 평원을 지나 지옥망령들의 도시로 이동하고 있다. 활을 쏘며 온갖 몬스터들과 싸우고 있다. 아니, 인자는 지금 어느 공장외벽 앞에 서 있다. 벽을 긁거나 그림을 그리면서 벽화보수공공근로를 하고 있다.

 

 혹한에도 아랑곳없이 참꽃이 피었습니다

 혹한에도 아랑곳없이 은행잎이 돋았습니다

 

 인자는 추위와 공해에 시달리고 있다. 아니, 인자는 콜드공격과 포이즌공격을 받고 있다. 움직임이 둔해지고 피가 줄어들고 있다. 인자는 몬스터들을 피해 피가 든 힐링포션Healing Potions을 먹는다. 아니, 인자는 행인들의 시선을 피해 도시락을 먹는다. 인자의 배가 불러온다. 아니, 인자의 피가 차오른다. 인자는 다시 몬스터들과 싸우기 위해 달려가고 있다. 아니 인자는 다시 벽화보수공공근로를 하기 위해 벽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혹한에도 아랑곳없이 참꽃이 피었습니다

 혹한에도 아랑곳없이 은행잎이 돋았습니다

 

 인자는 작업도구를 챙기고 있다. 아니, 인자는 아이템을 정리하고 있다. 레벨이 낮은 아이템을 레벨이 높은 아이템으로 바꾸고 있다. 레벨이 오른 인자가 레벨이 높은 아이템으로 레벨이 높은 몬스터들과 싸우기 위해 불길의 강으로 내려가고 있다. 아니, 동상에 걸린 인자가 페인트로 얼룩진 방한복을 입고 취미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작업실로 이동하고 있다.

 

 혹한에도 아랑곳없이 참꽃이 피었습니다

 혹한에도 아랑곳없이 은행잎이 돋았습니다

 

 인자는 그림을 가르치고 있다. 아니, 인자는 패시브와 매직스킬 Passive & Magic Skills을 배우고 있다. 인자는 디아블로와 싸우기 위해 생츄어리 Sanctuary 사원 안으로 들아간다. 아니, 인자는 잠을 자기 위해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눕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든다. 아니, 인자는 떼거지로 몰려드는 몬스터들의 공격을 받아 순식간에 죽고 만다. 오늘도 나는 인자의 시체를 보며 디아블로 게임을 끝낸다. 아니, 오늘도 나는 인자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한 채 하루를 보내고 있다. 아니, 오늘도 나는 하루종일 인자와 함께 지내다가 하루를 보낸다. 아니,

 

 혹한에도 아랑곳없이 참꽃이 피었습니까?

 혹한에도 아랑곳없이 은행잎이 돋았습니까?

 

 


 

 

여정 시인 / 한밤의 기초공사

 

 

 중장기의 거친 호흡이 달빛을 흔들어대는 밤, 덤프트럭은 내 가슴 한 가운데 굵은 바퀴자국만 남겨 놓고 잠을 싣고 멀어져 간다. 퍼내어도 퍼내어도 끝이 없는 흙더미, 내 가슴에 뚫린 구멍으로 비쳐드는 달빛이 너무 야위었다. 뿌리째 뽑혀버린 버드나무, 귀신처럼 머리를 풀어헤치고 내 가슴속을 떠도는 밤. 나는 기억한다, 그녀의 푸른 웃음과 그 뿌리 깊은 사랑을, 기초공사가 시작되기 며칠 전 그녀는 어느 갑각류의 껍질 속으로 뿌리째 떠나버렸고 나만 홀로 어둠 속에 남아 헤드라이트 불빛을 밝혔다. 내 살을 갉아대는 굴착기의 소음 속에서 나는 떠올린다. 내 살을 뚫고 세워질 그 건물의 견고한 외벽과 곳곳에 설치될 도난경보시스템을

 

 


 

여정 시인

1998년 《동아일보》신춘문예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벌레 11호』(문예중앙, 2011)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