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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현수 시인 / 세한도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2. 28.
박현수 시인 / 세한도

박현수 시인 / 세한도

 

 

1

어제는

나보다 더 보폭이 넓은 영혼을

따라다니다 꿈을 깼다

영원히 좁혀지지 않는 그 거리를

나는 눈물로 따라갔지만

어느새 홀로 빈 들에 서고 말았다

어혈의 생각이 저리도

맑게 틔어오던 새벽에

헝크러진 삶을 쓸어올리며 나는

첫닭처럼 잠을 깼다

 

누군 핏속에서

푸르른 혈죽을 피웠다는데

나는

내 핏속에서 무엇을 피워낼 수 있나

 

2

바람이 분다

가난할수록 더 흔들리는 집들

어디로 흐르는 강이길래

뼛속을 타며

삼백 예순의 마디마디를 이렇듯 저미는가

내게 어디

학적으로 쓸 반듯한

뼈 하나라도 있던가

끝도 없이 무너져

내리는 모래더미 같은 나는

스무해 얕은 물가에서

빛 좋은 웃음 한 줌 건져내지 못하고

그 어디

빈 하늘만 서성대고 다니다

어느새

고적한 세한도의 구도 위에 서다

 

이제

내게 남은 일이란

시누대처럼

야위어가는 것

 

 


 

 

박현수 시인 / 위험한 독서

 

 

영원히

제자(製字) 원리에 갇히지 않는 문자로

가득한 책

흔들리는 그림자로만 적힌

희미한 구문들이

끝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책

다른 이의

지문이 잔뜩 묻은 서적에

초연하던 예언자,

그의 말처럼 모든 책은

한 페이지의 표지에 불과하리니

허락되지 않은 내용이여

서지학은

얼마나 헛된 학문일 것인가

가장 가까이 있기에

한번 펼쳐

보았다가 나는 결혼했다

한번도

독파된 적이 없는 난해한 서적과,

 

 


 

박현수 시인

1966년 경북 봉화에서 출생. 세종대 국문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국문과 석사, 박사과정 졸업. 199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시집 『우울한 시대의 사랑에게』 『위험한 독서』 『겨울강가에서 예언서를 태우다』 『사물에 말 건네기』. 2007년 제39회 한국시협회상 '젊은 시인상'을 수상. 현재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