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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은강 시인 / 긴 낮잠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3. 1.
고은강 시인 / 긴 낮잠

고은강 시인 / 긴 낮잠

 

 

 빛나는 갈색으로 그을린 그녀의 굳은 얼굴은 화를 낼 때도 기뻐할 때도 단 한 가지 표정이었다. 웃는 입과 공허한 눈. 그것은 표정이 없는 것과 매한가지여서, 어렸을 때는 그녀의 얼굴이 참 신기했다. 그후 내가 스무 살이 넘은 어느 여름날, 그녀가 혼자 살다가 죽은 시골의 빈집에 가서 낮잠을 청한 적이 있다. 나의 큰어머니이자 아들을 낳지 못한 맏며느리였던 그녀는 그 집에서 오랜 시간을 혼자 사셨다. 기지개를 켜면 여름 바람이 불 것 같은 고요함. 어릴 때처럼 컴컴하고 기묘한 대청마루 아래의 어둠이 뒤섞여 나는 그녀처럼 얼굴에서 표정이 점차 사라졌다. 혼자서 모든 별들의 이름을 다 부를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긴 시간을 꾸었다. 저녁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보이는 슬픈 세계와 그녀의 따뜻한 품, 그 행간에서 나는 여전히 걸 어가고 있다.

 

 


 

 

고은강 시인 / 심심(心心), 심심(深深)

 

 

 올여름은 생각 속에 내내 잠겨 있었다. 그동안 쓴 시들을 꺼내 읽어보려 했는데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내가 알게 된 것은 시간이 지난다고 용기가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올가을의 가장 잘한 일은 생무화과를 처음 보고 처음으로 먹은 일. 상상보다 좋은 일이란 없고, 나쁜 일들은 넘치며, 상상을 넘어서는 맛은 없다는 사실.

 그래도 어제 들은 가장 좋은 말은 비극은 운명을 넘어서려는 사람의 기록이라는 말씀. 운명에게는 눈이 없다는 말씀.

 

 


 

고은강 시인

1971년 대전에서 출생. 상명대학교 국문과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2006년 제6회 《창비 신인시인상》을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