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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수 시인 / 느린 우체국
시월로 가는 간이역에서 느린 우체국을 만났습니다 느린 우체국 빨간 외발에 기대어 가을과 차 한 잔 나누는 사이 단풍나무가 엽서 한 장을 놓고 갔습니다 작년 이맘 때 상수리 숲, 청설모 겨울양식 몇 톨 덜어낸 일이 자꾸 생각나는 계절인데 그걸 눈치 챈 나무가 슬그머니 놓고 갔습니다 나는 깨알 같은 글씨로 엽서를 메우기 시작했습니다 허락도 없이 덜어낸 양식, 이웃마을까지 탁발을 다녀왔을 눈길을 생각한다고 때늦은 후회 몇 줄 담는 사이 가을은 닫히고 손도장으로 엽서를 봉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삼백예순날을 다 걸어야 수취인에게 닿는 엽서 한 장에 나를 내려놓고 뒤 돌아보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그날부터 낯선 간이역이 작은 우체국 한 칸을 싣고 밤마다 찾아옵니다 내려놓고 온 나는 보이지 않고 빈 엽서 한 장 우두커니 앉아있습니다 -「다시올문학」 2018년 가을 겨울호
김남수 시인 / 화살나무 숲을 지나오다 화살나무 숲을 지날 때의 일입니다
가지마다 초록 잎을 틔우고 코르크 날개로 어린잎을 지키고 서 있는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일시에 시위를 당기던 숲이 내 손목을 덥석 잡았습니다
훅 끼얹는 침묵 그때 화살나무 사립문은 온통 초록이었고 나무 발등에 산수유 노란 꽃잎 한 장 못다 나눈 이야기처럼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하루해가 남아있는 숙제를 참견하듯 가만가만 숲을 어루만지며 먼 산으로 넘어 가는 그 숲 나는 시위를 당길 수 없는 아픈 과녁이었을까 화살기도처럼
까악! 깊어가는 나무의 일생 앞에 산까치 짧은 외마디 울음이 지나가는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시인정신> 2018. 20주년 기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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