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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남수 시인 / 느린 우체국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3. 1.
김남수 시인 / 느린 우체국

김남수 시인 / 느린 우체국

 

​ 시월로 가는 간이역에서 느린 우체국을 만났습니다

 느린 우체국

 빨간 외발에 기대어 가을과 차 한 잔 나누는 사이 단풍나무가 엽서 한 장을 놓고 갔습니다

 작년 이맘 때 상수리 숲, 청설모 겨울양식 몇 톨 덜어낸 일이 자꾸 생각나는 계절인데 그걸 눈치 챈 나무가 슬그머니 놓고 갔습니다

​ 나는 깨알 같은 글씨로 엽서를 메우기 시작했습니다

 허락도 없이 덜어낸 양식, 이웃마을까지 탁발을 다녀왔을 눈길을 생각한다고

​ 때늦은 후회 몇 줄 담는 사이 가을은 닫히고 손도장으로 엽서를 봉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 삼백예순날을 다 걸어야 수취인에게 닿는 엽서 한 장에 나를 내려놓고 뒤 돌아보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그날부터 낯선 간이역이 작은 우체국 한 칸을 싣고 밤마다 찾아옵니다

 내려놓고 온 나는 보이지 않고 빈 엽서 한 장 우두커니 앉아있습니다

-「다시올문학」 2018년 가을 겨울호

 

 


 

 

김남수 시인 / 화살나무 숲을 지나오다

 화살나무 숲을 지날 때의 일입니다

 

 가지마다 초록 잎을 틔우고 코르크 날개로 어린잎을 지키고 서 있는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일시에 시위를 당기던 숲이 내 손목을 덥석 잡았습니다

 

 훅 끼얹는 침묵

 그때 화살나무 사립문은 온통 초록이었고

 나무 발등에 산수유 노란 꽃잎 한 장 못다 나눈 이야기처럼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하루해가 남아있는 숙제를 참견하듯 가만가만 숲을 어루만지며 먼 산으로 넘어 가는 그 숲

 나는 시위를 당길 수 없는 아픈 과녁이었을까 화살기도처럼

 

 까악!

 깊어가는 나무의 일생 앞에 산까치 짧은 외마디 울음이 지나가는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시인정신> 2018. 20주년 기념호

 

 


 

김남수 시인

충남 부여 출생. (본명: 김남순). 2008년 《평화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09년 《시안》 신인상 당선. 시집 『장미가 고요하다』 『둥근 것을 보면 아프다』. 2011년 서울문화재단 작가창작 활동 지원금 수혜. 201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 창작 지원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