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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신 앙 관 련

21세기 한국 가톨릭교회의 과제(6)

by 파스칼바이런 2012. 11. 23.
4. 삶의 질에 대한 관심 증가와 사회복지 문제

 

 

4. 삶의 질에 대한 관심 증가와 사회복지 문제

 

최근의 사회 발전 과정에서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일차적인 생존의 문제, 삶의 양적인 문제에서 ‘삶의 질(quality of life)’에 대한 강조로 이행하는 것이다. 삶의 질은 물리적, 환경적, 문화적 측면들을 포함하는 ‘삶의 종합적 상태’를 가리키며, 삶의 질 수준은 일차적으로 경제적 요인, 생활환경, 문화적 요인에 의해 결정되지만, 과학기술의 수준, 정치, 사회적 상황, 국제 정세 및 남북 관계에 의해서도 제약되거나 고양될 수 있다. 삶의 질을 중시하는 복지사회에서는 특히 ‘소비자 보호’ 및 ‘환경 보전 문제’ 등이 중요한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될 것이다. (배규한, ‘미래사회학’, 200, 251-255, 274-275쪽.)

 

198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사회는 문자 그대로 ‘복지의 시대’를 맞고 있다. 다양한 사회보장제도가 법제화되어 시행되기 시작했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사회 성원들의 복지 욕구가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분출되고 있다는 의미에서 ‘복지의 시대’라는 표현은 어느 정도의 적실성을 갖는다고도 볼 수 있다. 이른바 ‘사회보장의 5대 제도’ 가운데 국민 연금(노령), 의료보험(질병), 산재 보험(재해), 고용 보험(실업) 등은 비록 늦긴 했으나 현재 시행 중에 있어, 가족수당 제도를 제외하면 사회보장 체계의 뼈대를 일정하게 구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경제 영역의 많은 지표들이 선진국 수준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IMF 관리 체제 편입 이후 사회적 안전망을 시급히 구축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국민적 합의가 형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면에서 우리 사회는 여전히 ‘복지 후진국’ 상태를 벗어나고 있지 못한 것 역시 엄연한 현실이다. IMF 관리 체제로 편입될 당시까지 우리 사회의 복지 수준은 한심스런 상태에 처해 있었다.

 

한 학자의 주장에 의하면, 각종 연금과 의료보험 등 사회복지 제도의 시행 상태를 기초로 할 때 우리나라의 복지 수준은 세계 122위 수준에 불과했다. ‘동아일보’ (1995/2/22). 또 자주 지적되어 온 사실이지만, 우리나라의 정부 예산 지출 대비 사회복지 예산의 비율은 1991년 현재 9.7% 수준으로, 이는 일반회계의 20%를 넘는 미국이나 영국 등의 선진국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와 비슷한 경제 수준인 브라질 19.9%, 멕시코 12.4%, 대만 17.0%에도 훨씬 못 미치며, 국민소득 하위 국가인 스리랑카(16.5%), 이집트(12.0%)에도 뒤진 상태였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한국의 복지 정책을 뒷받침하고 있는 기초적인 운영 원리와 관련된 것이다.

 

현재까지도 한국의 사회보장제도는 경제적, 사회적 생활보장이라는 본래의 목적은 물론 상위 목표인 사회적 평등의 달성과도 거리가 먼 것이 현실이다. 우리의 복지 제도는 시장 원리에 강하게 의존하고 있어 개인적인 경쟁이나 능력이 부족한 사람일수록 복지 혜택에서 소외되기 쉬운 구조적 결함을 가진 것으로 주장되어 왔다. 5대 사회보장제도를 갖췄다고는 하지만, 이 제도들은 협소한 적용률과 정부 재정 부담의 과소함으로 인해 매우 허약한 체질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994년 말 현재 고용 보험의 경우 전체 노동자의 50.1%, 국민 연금의 경우 30%, 의료보험의 경우 10%가 이 제도들의 수혜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한겨레21’ (1995/1/5), 24-27쪽.)

 

한국인들 사이에 복지 욕구가 폭발하는 시점이 1970년대 이후 서구 국가들을 중심으로 ‘복지국가의 위기 내지 해체’현상이 광범하게 확산되는 것과 시기적으로 중첩되어 있다는 사실은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복지 후진국’인 한국은 본격적인 복지국가 단계에 진입하기도 전에 ‘복지의 효율성’과 ‘복지의 민영화’를 강조하면서 벌써부터 복지국가를 아예 뛰어넘어 ‘반관반민(半官半民) 형태의 혼합적 복지 정책’으로 이탈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서구에서는 1970년대의 복지국가 위기를 겪은 후 팽창된 복지 예산으로 인한 재정 적자 해소와 예산 운용의 효율성 제고를 위해 ‘복지 다원주의’를 내세워 공공 부문의 사회복지를 민간 부문으로 이양하는 ‘민영화’전략을 취하고 있다. (정병오, “사회복지사업에의 민간 참여 확대와 문제점,” ‘가톨릭 사회복지’ 제2호 (1994년 봄), 18쪽.)

 

1990년대에 한국 정부 역시 ‘신경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면서, 사회복지 영역에 대한 민간 부문의 참여를 보다 적극적으로 유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민의 증대되는 복지 욕구와 대조되는, 복지 서비스의 시장 원리에의 방임은 사회적 약자들의 ‘복지 박탈감’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의 경우 서구처럼 ‘국가의 복지 영역으로부터의 점진적 철수’가 아니라, 국민들의 급상승하는 복지 욕구에 밀려 사회복지 영역에 대한 국가 개입이 점점 확대되는 경향과 함께, 국가가 능동적으로 민간 부문의 참여를 유도함으로써 복지 부담을 분담하고 예산 운영의 효율성을 제고하려는 경향이 동시적으로 발전되는 양상을 보일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앞으로 상당 기간 동안 민간 부문, 혹은 민간 부문과 공공 부문의 협력에 의한 사회복지 영역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될 예상이다. 이 점은 앞으로도 가톨릭교회를 비롯한 종교 조직들의 사회복지 참여에 대한 사회적 기대가 계속되리라는 판단을 가능케 하는 사회구조적 기초가 된다.

 

한편 오늘날 종교의 사회적 공신력(social credibility) 정도는 그 종교가 사회봉사 활동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적으로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활발한 사회복지 활동을 전개 해온 개신교까지 포함하여 대부분의 종교들이 교회의 양적인 성장에만 매달린 나머지 사회봉사나 구제비에 지나치게 낮은 비율의 예산을 지출하고 있는 현실이 오늘날 비종교인들로 하여금 기존 종교들을 불신케 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다원주의적인 종교상황이 가하는 종교 간의 경쟁 압력, 특히 개신교, 천주교, 불교간의 경쟁 압력으로 인하여, 또 국민들의 사회복지 욕구가 폭발적으로 증대되는 상황으로 인하여, 사회복지 활동에의 참여 정도에 그 종교의 미래의 생존과 양적 성장이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 가고 있다. 벌써부터 개신교와 불교계에서는 사회복지 부문에 대한 교회 차원의 관심을 촉구하는 주장들이 사회과학계와 신학계에서 강력히 제기되고 있고, 각 종교들의 관심 역시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특히 불교와 원불교의 사회복지 활동은 매우 빠른 속도의 발전상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우리 교회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사회복지 영역에 보다 과감한 투자와 개입이 요구되는 상황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사회복지 지출에 대해 대단히 소극적이며, 개별 본당에서 사회복지 분야는 중요도와 우선순위에서 낮은 지위밖에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주교 회의 사회복지 위원회가 실시한 전국적인 조사에 의하면, 1996년도에 본당의 총지출액 중 사회복지 지출 비율의 평균치는 4.3%에 불과하여 주교 회의가 권고한 10%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김인숙, 최해경, 이선우, ‘한국 가톨릭 사회복지의 실태와 전망’ (서울: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회복지 위원회, 1997), 77-81쪽.)

 

또 서울대교구의 사제, 수도자, 평신도들을 대상으로 한 1996년의 조사 연구에 의하면, 본당 사회복지사업을 위한 물적 토대, 특히 시설 자원은 취약한 편이다. 나아가 본당 사회복지 분과의 전체 사업에서 어느 정도의 지속성을 갖고 연중(年中) 계속되는 사업은 절반 정도에 불과하며, 나머지 절반의 71.2%는 12월 한 달에만 이루어지는 일과성 사업들이다.

 

서울 대교구 신자 10명 중 4명은 본당에 사회복지 분과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고, 사회복지 분과의 활동 내용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신자는 10명 중 1명도 채 되지 않는다. 놀랍게도 사회복지분과장과 사제, 수도자들에 대한 사회복지 관련 교육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교육의 내용도 매우 빈약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지도자가 아닌 보통 평신자들을 사회복지활동에의 참여로 동기화하거나, 인적 자원의 질을 제고하려는 본당 수준의 교육적 노력이 대단히 미흡하게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또 사회복지에 대한 사회적 수요는 늘어나는 데 비해 교회의 물적·인적 자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적절히 훈련되고 투신의 의지를 지닌 자원봉사자의 존재야말로 한정된 물적, 인적 자원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면서 교회의 사회적 봉사 기능을 훌륭하게 충족시킬 수 있는 길임이 분명한데도, 자원 봉사 활동을 한 적이 있는 신자의 비율(40%)과 자원 봉사 활동에 참여해 본 경험이 없는 신자들의 경우 앞으로 자원 봉사에 실제로 참여하겠다고 응답한 사람의 비율(40%)은 모두 3년 전에 비해 크게 감소했다. (강인철, 박주원,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회복지의식 및 활동실태에 관한 조사연구 보고서’ (서울: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1996).

 

따라서 교회의 재정적 자원의 배분에서 사회복지 분야의 우선순위를 높이고 본당의 사회복지 지출 비율을 적어도 10%선까지 상승시켜야 할 것이며, 사회복지 지도자와 평신도에 대한 교육을 대폭 강화해야 할 것이다.

 

또한 소득 향상과 근로시간의 단축, 다양한 여가 시설의 증대로 인해 여가 생활이 늘어나고 또한 중시되는 방향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소득의 증가에 대해서는 이미 살펴본 바 있거니와, 근로시간 역시 비교적 빠른 속도로 단축되고 있다. 1980-1990년 동안 제조업 근로자의 주당 근로시간은 42.0시간에서 36.2시간으로 크게 단축되었고, 특히 2차 산업과 3차 산업 일부에서는 주5일 근무제가 보편화되고 있다. 배규한, ‘미래 사회학’, 195-196쪽.

 

이 같은 추세는 1990년대에도 계속되고 있다. 대우경제연구소의 ?93~96년 소비 및 근로 행태와 일상생활의 변화? 보고서에 의하면, 1993-96년 사이에 근로시간이 오히려 늘어난 농수산업 종사자(3.4시간 증가)를 제외한 자영업자(5.1시간 감소)와 봉급생활자(0.8시간 감소)의 근로시간은 감소하고 있다. 또한 젊을수록 근로시간이 짧아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가장 오래 일하는 40대의 주당 근로시간은 58.7시간인 데 비해 가장 짧게 일하는 20대는 49.7시간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겨레신문’ (1997/6/5).

 

여가 활동의 내용에서도 비교적 뚜렷한 변화가 발견되는데, 1990년 현재까지도 ‘수면 및 가사’와 ‘텔레비전 시청’이 전체의 68.5%를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스포츠 및 여행’, ‘창작적 취미, 오락’ 등의 비중이 증가하는 등 고급화하고 있다. 앞으로도 교육 수준 향상, 교통망의 확충, 국민 건강 의식의 고양에 따라 여가 생활은 더욱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여가에 대한 관심의 증가를 ‘세속화’와 연관짓거나 여가 생활을 종교의 ‘기능적 대형물(functional alternatives)’의 하나로 간주하여 이것이 교회 생활에 대한 관심과 열의의 감소 내지 교회 성장을 둔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견해가 제시되고 있기는 하지만, 예컨대 이원규, ‘한국 교회의 현실과 전망’ (서울: 성서연구사, 1994), 195-196쪽을 보라.

 

여가 생활의 증가가 반드시 세속화를 강화하거나 교회 성장을 둔화시키는가는 분명치 않다. 최근의 조사 연구에 의하면 약 20%의 신자들이 취미 활동을 하거나 놀러 가느라고 주일미사에 불참하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이것이 ‘냉담’과 같은 장기적 혹은 영구적 교회 이탈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강인철, 박주원, ‘냉담자 연구’) (서울: 우리신학연구소, 1996).

 

신자들이 여가 생활과 신앙생활을 양자택일적인 문제 상황으로 인식하는 경우, 혹은 교회에서 불필요하게 이를 양자택일적인 문제로 인식하도록 조장할 경우에만 여가 생활에 대한 강조가 교회 이탈자의 증가로 나타날 것이다. 오히려 여가 생활의 증진은 삶의 질의 제고라는 차원에서 교회가 앞장서서 요구해야 할 문제이다. 또한 교회는 신자들의 건전한 여가 생활을 지도하고 교육해 갈 필요가 있다. 그럴 경우 신자들은 판에 박은 습관적인 신앙생활에서 벗어나 신선한 신앙 체험의 기회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