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사회 민주화와 교회 민주화의 요구
198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사회는 ‘권위주의로부터 민주주의로의 이행기’에 처해 있다. 민주주의로의 이행 과정은 두 단계로 구성되는데, 현재 우리 사회는 ‘형식적, 절차적 민주화’의 단계를 거쳐 ‘실질적 민주화’의 단계로 접어드는 시점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정치 영역에서의 민주화는 한편으로 중앙에서 지방으로 확산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민주화에 대한 요구는 정치로부터 사회, 경제적 영역으로 확장되어 가고 있다.
반면에 민주주의의 새로운 장애로서, ‘정-경-언(政-經-言) 복합체’에 의한 과도적 지배가 강화되고, 특히 국가 외에도 기업과 언론의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이 급속히 확대되고 있다. 따라서 국가와 시장의 협공으로부터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여하히 수호하고 확대해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매우 중요해지고 있다. 이와 동시에 사회의 복잡화, 다원화에 따라 ‘다양한 집단간의 이해 갈등’이 증가하는 추세에 있기도 하다.
더욱이 각 집단들은 공권력에 의존하기보다는 스스로 나서서 갈등을 해결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제력(폭력)과 교환력(물질적 보상)이라는 기존의 사회통제 기제는 앞으로 위력을 점차 잃어 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따라서 기존의 사회통제 원리와는 다른, 사회적 이익들의 조정, 중재를 위한 새로운 체제와 원리를 찾아내야 하는 과제가 제기되고 있다. 배규한, ‘미래사회학’, 107-108쪽.
한국사회의 형식적 민주화에 따라 시민 영역의 팽창이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으나, 시민사회의 주요 구성 부문인 가톨릭교회의 역할은 종전에 비해 크게 축소되고 있고 새로운 역할 모색의 노력도 미진한 편이다. 더욱이 지금까지의 민주화와 개혁 조치가 형식적이고 불철저하고 심지어는 허구적이기조차 함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는 1980년대 중반까지 유지해 왔던 국가와의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긴장 관계를 유지하는 데 실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교회의 정치사회적 영향력은 물론이고 도덕적 영향력마저 약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팽창된 시민사회 안에서 적절한 위치와 역할을 모색하고, 불철저한 민주화를 참된 민주화로 나아가게 하는 데 기여하기 위한 연구와 전략 수립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시대 상황에 부합하는 새로운 ‘가톨릭 정치 윤리’를 정립하고, 이에 기초하여 신자들을 교육하는 것이 중요해지고 있다.
민주화의 진전 및 시민권의 확장에 따라 여성운동과 환경 운동 등을 포함하는 다양한 시민운동 세력과 노동운동 세력이 강력한 정치적 행위자이자 여론의 주도자로 부각되고 있다. 따라서 이들 사회 세력과 적절한 협력 체제를 유지하는 것, 그리고 이 분야들에서 교회 내에 관련된 신자들을 조직화하고 동원하는 일이 매우 중요해진다. 또한 기업과 언론의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이 급속히 확대되는 가운데 ‘정-경-언 복합체’에 의한 과두적 지배가 강화되고 있으며, 국가와 시장의 협공으로부터 교회의 상대적 자율성을 수호하고 확대해 가는 문제, 나아가 시민사회 전체의 자율성 수호와 확대에 교회가 기여하는 문제가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따라서 기업과 언론의 활동을 견제, 감시하고, 단순한 ‘선교’ 언론의 기능을 넘어 공정하고 서민의 원망을 대변하는 대안적 언론의 상을 실천적으로 제시하고, 무한경쟁과 적자생존, 이기주의, 물신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경제 윤리를 제시하는 동시에 모범적인 사례를 발굴, 육성, 후원하는 것이 필요하게 된다.
또한 21세기에는 강제력(폭력)과 교환력(물질적 보상)의 사회 통제력으로서의 위력이 감소하는 반면, 권위적 힘 특히 ‘전문적 권위’와 함께 교회의 ‘도덕적 권위’에 대한 자발적 승복이 사회질서의 유지 그리고 사회 발전을 위한 역량의 결집에 중요한 요소로 부각될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도덕적 권위에 바탕 하여 다양한 시민운동 단체들과 함께 시민사회 이익 갈등의 중재자로서의 새로운 지위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이 경우 권위주의 국가에 의해 시도된 종전의 ‘억압적, 강제적, 배제적 중재’가 아니라 ‘민주적, 자발적, 포용적 중재’를 지향해야 할 것이며, 교회는 때때로 시민운동 단체들 간의 갈등과 경쟁마저 조정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사회 성원 전체, 사회의 공동선 자체를 대표, 대변하지 못하고, 또 하나의 이익 단체나 이권 단체처럼 부각되어서는 안 된다.
이 경우 교회에 대한 사회적 공신력은 점차 혹은 급속히 감소하게 될 것이다. 김영삼 정부의 등장 이래 불교-개신교의 갈등이 심화되고 점차 정치화되는 데서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듯이, 정치 시장에서 종교의 효용성이 증대됨에 따라 정치인들이 종교 영역에 개입하여 종교 간의 갈등을 조장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유혹이 커지고 있다. 특히 지역주의 이데올로기가 위력을 잃게 되는 경우 그 자리를 종교 간의 갈등이 채우게 될 가능성도 있다.
이 과정에서 종교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질지는 모르나, 종교 간의 갈등이 시민들에게는 종교적 집단 이기주의의 각축으로 비쳐질 가능성이 크다. 1990년대 들어 가톨릭을 제외한 한국의 대부분의 종교들이 교세의 정체 내지 후퇴 상태에 빠지게 되고, 한국의 종교 지형이 불교, 개신교, 가톨릭의 3대 종교가 총인구의 절반 및 종교인구의 거의 대부분(97% 내외)을 차지하는 3자 정립 구도가 굳어짐에 따라, 3대 종교 간의 경쟁은 급격히 격렬해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종교 간의 경쟁이 정치적 쟁점과 결합될 경우 종교 간의 갈등은 지역 갈등과 더불어 한국 사회의 분열을 가속화하는 요인이 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이 같은 상황을 예견하고, 종교 간의 대화와 관용, 협력을 증진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또한 지방 정치, 작은 정치, 생활 정치의 중요성이 부각됨에 따라, 지역 교회의 존재가 더욱 부각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지자제의 본격적 실시에 따라 정치적, 사회적 쟁점의 세분화, 공론화, 지역화 추세가 강화될 것은 분명하다. 이에 따라 개별 본당 혹은 몇 개 본당들의 연합으로 지역적 문제들에 대응해야 하는 경우가 더욱 자주 발생하게 될 것이다.
지역 주민들의 삶의 질의 문제, 지역 주민들의 다양한 욕구들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비효율적으로 대처하는 본당이 해당 지역의 주민들 사이에서 높은 수준의 사회적 공신력과 도덕적 영향력을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평등, 자유, 정의, 평화를 증진하는 직무들”, 다시 말해 예언직의 수행은 1970년대 이후 한국 천주교회가 높은 수준의 사회적 공신력을 획득하고 나아가 교세 증가를 이룩하는 데 원동력이 되어 왔던 만큼, (오경환, “교회의 목적과 예언자 직의 중요성,” ‘사목’ (1993/12).
이 방면에서 본당들이 지역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들어가야 할 것이다. 동시에 1980년대 후반부터 급격히 고양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사회복지 문제에 대한 관심에 부응하기 위해 “노인, 장애인 등 특별히 곤란을 겪는 이들을 돕는 프로그램들”을 지역의 요구에 맞게 개발하고 실행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지역 문제에 대한 탄력적이고도 효율적인 대응 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역 본당 사제들에게 더욱 많은 자율성이 부여되어야 할 것이고, 또한 점점 세분화되고 전문적인 지식과 능력이 요구되는 지역적 쟁점들을 풀어 가기 위해 본당 내의 평신도 전문가를 발굴, 육성하고 조직화하는 과제도 중요하게 부각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지역 내의 종교적, 비종교적 민간 조직들과 협력하는 경험도 축적되어야 할 것이다.
실질적 민주화의 단계에서는 민주화의 요구가 경제 영역을 넘어, 언론, 대학, 교회로까지 확장될 것임을 뜻한다. 특히 교회가 운영하는, 비신자 직원이 상당수 포함된 대학, 병원 등 각종 기관이 일차적인 타깃이 될 것이다. 특히 전문적인 권위를 결여한 성직자나 수도자가 운영 책임을 맡게 되는 경우 잦은 충돌이 예상된다. 민주화에 대한 요구는 교회 안에서도 제기될 것으로 보인다.
문민정부의 등장과 지방자치제의 본격적 실시, 시민운동의 활성화 등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민주화 과정은 이런 경향이 교회에서도 실현되기를 바라는 평신도 층의 기대 수준을 더욱 높일 것으로 판단된다. 세속 사회의 지배적 가치에 대한 영합도 문제이지만, 우려되는 바는 세속 사회와의 ‘가치 격차’가 너무 크면 전반적인 사회 발전과의 괴리 심화로 인해 교회 안에 폐쇄적 하위문화가 형성되고 교회 자체가 점점 게토화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 신앙의 자립화, 단편화, 형식화 등을 조장하는 가운데, 신앙생활이 점점 세상과 이원화되고 개별 신자들에게서 교리적 충성과 실제 생활 윤리의 괴리를 낳게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천주교 신자들의 낙태나 이혼 관행 등에서 교리적 충성과 생활 윤리가 이미 심각할 정도로 괴리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원래 천주교의 교회 조직은 고도로 중앙집권적이어서 평신도 층에게는 교회 운영에서 제한된 참여만이 허용된다. 한국 천주교회의 경우에도 다른 종교, 특히 개신교에 비해 평신도가 교회 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가 크게 제한되어 있다. 노치준, ‘한국의 교회 조직’ (서울: 민영사, 1995), 84-85쪽.
서구의 천주교회들과 비교해도 평신도들의 이니셔티브는 거의 보장되어 있지 못한 편이다. 이는 한국 교회의 권위주의적 속성에도 연원하지만, 도시 본당의 과잉비대화, 그리고 그에 따른 교회 운영 방식의 관료화도 중요한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문제는 이 같은 현상이 평신도 층의 참여 욕구 증대와 동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점이다. 1980년 이후 시행된 몇 차례의 조사 연구 결과들은 교회 운영이 좀더 민주화되고 참여의 문호가 더욱 넓게 열리기를 평신도들이 바라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컨대 전체 가톨릭 신자에 대한 여성 신자의 비율이 1990년 현재 60.3%에 달하고, 여성 신자들이 공식적인 의례에 대한 참여, 교회 하부조직에의 참여, 지역 교회의 다른 일상적인 종교적 기능 수행에의 참여 면에서 남성에 비해 매우 적극적이고 헌신적인 현실에서, 여성 신자들의 절반 이상이 본당 여성 사목 위원의 비율이 적어도 40%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강인철, 박문수, ‘한국 천주교 여성신자 실태 및 의식 조사’ (서울: 우리신학연구소, 1995), 212쪽.
이 결과는 여성 신자들이 주어진 현실에 상당한 불만을 느낄 가능성이 높을 뿐 아니라, 여성 신자들의 이처럼 높은 기대와 요구가 그에 훨씬 미달하는 현실과 마찰을 빚을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한다. 특히 여성 신자들의 참여 요구는 고학력의 취업 여성들이 늘어나면서, 또 일반적인 여성운동의 활성화에 따라 더욱 거세질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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