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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교회미술산책

[현대 그리스도교 미술 산책] (9) 존 허튼과 ‘성인들과 천사들의 스크린’

by 파스칼바이런 2014. 6. 7.

[현대 그리스도교 미술 산책] (9) 존 허튼과 ‘성인들과

천사들의 스크린’

 

세상과 소통을 향해… 하느님 빛 머금은 유리벽

구약 인물 성인 천사 등 66명 인물 새겨

전쟁 아픔·평화 갈망의 공간이 하나로 조우

 

유리 인그레이버로 알려진 존 허튼(John Hutton, 1906~1978)은 스코틀랜드와 웨일즈에서 뉴질랜드로 이민 갔던 영국인 2세대이면서 1975년 창설된 영국 글라스 인그레이버 길드(British Guild of Glass Engravers)의 초대 부의장이 되었다. 그는 잉글랜드 길포드(Guildford)와 코번트리(Coventry) 대성당을 비롯하여 캐나다 국립도서관, 셰익스피어 센터(Shakespeare Centre), 플리머스(Plymouth)와 뉴카슬(Newcastle)의 시민회관 등 수많은 공공건축물 등에 작품들을 남겼다. 그의 작품들 대부분은 유리 출입문과 유리 벽(glass screen)에 조각한 인물 부조였다. 이러한 인물 형상들은 딱딱하고 다루기 예민한 유리 재질에 펜으로 스케치를 한 듯 섬세하게 새겨진 선과 함께 유리의 투명도를 조절하여 색채 없이도 명암과 입체감을 살린 생동감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오늘날 무엇보다 존 허튼을 위대한 예술가로 기억하게 한 작품은 영국 코번트리 대성당(Coventry Cathedral)의 ‘성인들과 천사들의 스크린 Screen of Saints & Angels’이었다. 이 유리 벽 작품을 이해하는 열쇠는 먼저 코번트리 대성당의 역사로부터 출발한다. 코번트리 지역은 영국 중부지역의 전형적인 제조업 도시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세계대전 중인 1940년 11월, 독일군의 공습으로 참혹한 희생을 겪어야만 했다. 특히 코번트리의 대표적인 성 미카엘에게 봉헌된 대성당은 무참하게 파괴되었다. 이후 대성당은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며 새롭게 재건되었다. 특히 대성당 내의 서덜랜드(Sutherland)와 존 파이퍼(John Piper)같은 작가들의 작품은 세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 ‘성인들과 천사들의 스크린’ 부분.

 

하지만 코번트리 대성당을 떠올렸을 때 우리에게 가장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은 그 규모나 유명 작품이 아니라 파괴된 대성당과 새로 재건된 대성당이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에 있다. 새롭게 재건된 대성당은 모진 세상풍파를 경험하고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품에 안은 아버지처럼, 앙상하게 외벽만 남은 대성당을 곁에 품고 서있다. 방문자들은 두 건축물 사이에 설치된 포치(porch)와 계단을 통해 폐허가 된 대성당과 새 성당 사이를 오가며 감회에 젖게 된다. 그렇지만 이 서로 다른 두 건축물의 진정한 연속성이 어디로부터 오는가를 좀 더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바로 새로운 대성당의 서쪽 유리벽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전통적인 대성당들은 서쪽 벽과 문을 ‘파사드’(facade)로 삼았다. 따라서 대성당의 파사드는 건물의 중요한 정면으로 마치 천국으로 가는 출입구와 벽이 되어 예수님과 성모님, 성인들과 천사들의 조각 또는 종교적 장면으로 꾸며졌다. 한편 파사드는 장미창을 두고 빛을 투과하기도 했지만 세속의 공간과 성당 내부를 철저히 불연속적인 공간으로 나누기도 했다.

 

 

▲ 존 허튼(John Hutton), ‘성인들과 천사들의 스크린 Screen of Saints & Angels’,

1962, 영국 코번트리 대성당.

 

이와는 다르게 코번트리 대성당은 파사드 역할을 하는 유리벽을 통해 성당내부와 세상이 소통할 수 있도록 열린 공간을 제공한다. 대성당 내부에서는 폐허의 유적이 있는 세상을 바라볼 수 있고, 성당 밖 폐허의 유적에서는 환상적인 대성당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다. 따라서 유리벽은 전면에 빛을 투과함은 물론 과거와 현재, 전쟁으로 상처 난 폐허와 평화를 갈망하는 종교적 공간이 조우하도록 허락한다. 수십 개의 격자 유리가 모인 벽에는 과거 파사드처럼 구약의 인물들과 천사들, 복음사가들, 예수와 마리아, 영국성인 등 66명의 인물이 실물보다 크게 새겨져있다. 규칙적인 격자의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형상을 번갈아 조각하기도 하고 때로 격자를 무시하고 대각선 형태의 천사들을 리듬감있게 배치하기도 했다. 유리벽에 새겨진 이 성인과 천사들은 성스러운 영(靈)으로 날아올라 우리 자신을 반사하기도 하고 우리가 바라보는 곳을 비추기도 한다. 따라서 유리벽은 조용히 말을 건넨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 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최정선 선생은 숙명여자대학교에서 서양미술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숙명여대에 출강 중이며, 부천 소명여자고등학교 역사교사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