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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희 시인 / 밤의 물방울 극장
배의 검은 유리창에 물방울들이 소리 없이 매달려 있다 음이 소거된 밤의 유리창에는 지옥도 천국도 한 편의 심야영화 같고 유리창에 아직 맺혀 있는 물방울 단 하나의 눈동자, 클로즈 업, 물방울은 지금 안을 고요히 들여다보고 있다
막차를 탄 사람들 사이엔 어떤 비애와 너그러움이 흐르는데 어떤 물방울에도 이야기가 많겠지만 물방울은 물방울끼리 손목을 잡고 주르륵 굴러 떨어지고 카날 그란데, 베네치아 밤물결에 별빛이 굽이친다 배 유리창에는 물방울 속에 피곤한 사람들의 모습이 겹쳐져 밤의 풍경이 되어간다 카도로! 카도로! 뱃사공의 소리가 밤을 울리고 물방울은 주르륵 굴러 떨어져 대운하의 물결에 합류한다
이 허무의 무대에서 굽이치는 물결만이 영원한 것처럼 죽음은 이렇게 밤의 인물화가 풍경화가 되어가는 과정 풍경이 된 모든 밤이 아름답고 배를 타고 더 가야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파도는 높고 바람은 강하고 아무 것도 기억 못하는 물방울 이름도 고향도 없는 물방울 유서도 유산도 없는 물방울
베네치아의 밤은 카날 그란데를 흘러가고 강물은 흐르고 사람은 가고 찰칵 카메라 셔터 누르는 소리 외롭게 라이터 켜는 소리 왈칵 별빛이 쏟아지는 소리 등대도 없는 밤바다에 물방울은 심야극장을 이루며 캄캄한 바다 저 너머로 검은 관처럼 출렁출렁 흘러가고 있다
월간 『현대문학』 2018년 1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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