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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현형 시인 / 연인을 앞에 두고 연인을 생각하는 버릇
집에 들어가기 싫어 지구를 배회하며 자전하는 어른처럼 그림자는 목이 길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버릇일까 시간을 앞에 두고 시간을 상상하는 버릇 연인을 앞에 두고 연인을 상상하는 버릇
슬픔이 건들거리는 걸 보니 가을인가보다 연인과 시간에게 미안해하며 나를 상상하기 시작한다
건축물의 진입로와 골목, 관계의 각을 빠져나왔을 때 비로소 생이 실감난다 모든 사랑이 과거였음이 실감난다
양자역학이나 AI, 우주의 수많은 행성들 파노라마처럼 번지는 빛과 파멸을 이해하느라 두통이 찾아왔으므로 전생에 대한 상념에 빠지지 않았다 결국 숫자 0을 발견한 수학자가 옳았음을
긴 세월에 걸쳐 내게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연인을 앞에 두고 연인을 그리워하는 버릇 때문에
계간 『미네르바』 2018년 겨울호 발표
권현형 시인 / 두터운 요리책을 네게 선물하고 싶다
곧 사라질 가녀린 그리움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치유될 수 있다는 믿음을 네게 주고 싶다 두터운 요리책을 네게 선물하고 싶다
삶은 감자가 조금 비리고 아렸다 구운 고등어 탓이기도 하겠으나 읽기만 해도 상처가 되는 문장을 간밤에 읽었다
유리 구슬을 한 사발 담아 온 겨울의 정원, 물끄러미 음악을 듣다가 체할 뻔했다 물끄러미는 지느러미, 안녕 나의 흰 지느러미
흰 빛은 모든 파장을 담고 있는 색 먼지와 먼지 사이에 있는 모든 것
그 모든 것의 눈을 잠시 예의를 갖춰 들여다보았다 잠시 우산을 들고 잠시 꽃을 들고 잠시 모자를 들고 수백 년 된 창문들이 말을 거는 곳
맑은 말에도 돌을 할퀴는 예리함이 있다 겨울의 정원에 입문하며 고독이 인간을 타락시키지 않는다는 믿음을 버렸다
계간 『문학괴 사람』 2018년 겨울호 발표
권현형 시인 / 시켜 먹는 밥 -시켜 먹는 밥은 외로운 공연과도 같다
주워 온 가리비 잔으로 고량주를 먹던 날 유랑의 밤이 우리 모두에게 찾아왔다 유령은 비밀이 되기로 한 자들
난로를 껴안고 사는 사람의 내부 온도는 비밀 하루에 백 살이 된다는 날 잠들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는 날 여럿이 밥을 시켜먹었다
시켜먹는 밥은 숟가락과 젓가락을 무장 해제한다 2차 세계대전이 전 지구적 해프닝이라고 연대기를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과 밥을 먹었다 아버지의 포도나무에서 아버지의 포도나무로
기원이 줄을 타고 올라가 남의 우연끼리 닮을 때도 있음을 막내들은 빨리 고아가 된다거나 순수 혈통이 나중에 고통의 이유가 된다거나
왜 이모들은 기념일에 시계를 선물할까 내가 받은 대부분의 시계는 이모들이 사주거나 물려준 것 시간은 부계가 아니라 모계로 흘러가는 것
생각지도 못한 고백을 듣게 될 때가 있다 아무도 없어 내겐, 그런 말은 듣기만 해도 고독이 그늘처럼 옮겨 앉는다 모든 일은 시켜 먹는 밥이 시킨 일
시켜 먹는 밥은 외로운 공연과도 같다 공연의 제목은 <매 순간 영원히 함께, 노트랑>
계간 『실찬문학』 2018년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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