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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구석본 시인 / 구름,실존을 말하다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11.

구석본 시인 / 구름,실존을 말하다

 

 

흩어지고 싶어요.

나의 견고한 모양과 색채를 풀어 흩어지고 싶어요.

바람처럼 흘러가고 싶어요.

 

나는 두둥실 떠 있어야 하는가요.

허상이면서 실상처럼,

당신 밖에서 뭉게뭉게 피어올라야만 하는가요.

당신은 모르고 있어요.

내 속에 숨어 있는 천둥,

마지막 비명으로 전하고 싶은 마음을,

혹은 터트릴 순간을 엿보고 있는 벼락의 소리를,

 

언젠가 당신의 몸과 영혼 속으로 한 순간 타올라

흩어지고 싶어요. 쏟아지고 싶어요.

 

소나기로 쏟아져 당신의 몸 깊은 곳으로 흘러

한 생의 허공 속으로 스며들고 싶어요.

 

그러나 하릴없이 당신의 바깥에서 두둥실 떠 있다

스스로 허공이 될 거예요

 

계간 『문파』 2019년 봄호 발표

 

 


 

 

구석본 시인 / 마네킹의 눈물

 

 

얼굴을 뭉개버렸다 눈을 지우고 코를 지우고

입조차 깨끗이 뭉개버린 다음

영혼을 비우고서야

매끌매끌하고 반짝거리는 한 덩이의 물체가 되었다.

 

그리하여,

당신의 이목구비(耳目口鼻)와 관계한다.

당신의 눈에서 절제된 눈물을,

붉게 채색된 입술을 복제하고

당신의 영혼까지 은밀하게 서서히 석고로 굳히면

 

뜻밖에도 당신,

나 아닌

당신의 원형이 떠오른다.

 

매끌매끌하고 반짝거리는 한 무리의 당신,

 

한 무리의 당신은 적절하게 그늘을 드리우는 조명 아래 수의(壽衣) 같은 옷을

나 대신 입고 복제된 수많은 당신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혹은 사로잡힌다.

 

아름다운 것은 눈물이 없어요.

눈에는 눈물 대신 외로움이 보석처럼 반짝이지요.

 

조명이 꺼지면

물품관리실 구석의 어둠 속에서

더 깊은 어둠이 되어

아름다운 당신을 대신하여 외로움의 눈물을 흘린다.

 

계간 『시로 여는 세상』 2018년 여름호 발표

 

 


 

 

구석본 시인 / 가을의 의성어

 

 

가을날 산을 오르면 나무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쓸쓸, 나무가 혼자 중얼거리는 말

쓸쓸, 쓸쓸,

아니, 나무와 바람이 주고받는 말

아니다 낙엽이 스치는 소리다.

좀 더 귀를 기울여 봐

나무와 잎과 바람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울리는 소리다.

쓸쓸, 쓸쓸, 쓸쓸

 

우리가 처음 손잡았던 그 가을날 저녁

어둠 속에서 떨리던 너의 목소리,

‘사랑한다는 것은 쓸쓸함을 나누는 것이야, 쓸쓸함의 체취를 주고받는 것이야’

그때는 혼돈의 말이었지.

 

이제야 들려온다, 너의 쓸쓸함이 내게로 건너온다. 가을엔 나무와 잎, 나무와 나무, 잎과 잎, 숲과 하늘의 경계가 바스러져 서로를 넘나든다. 서로를 지우고 있다. 바야흐로 명료한 하나의 세상이다. 존재의 몸들이 지워진 다음, 몸 없는 존재가 투명하게 일어서고 있다. 소리로 울려오던 쓸쓸함이 나무처럼 일어서고 잎처럼 팔랑이고 드디어 눈물처럼 영혼의 계곡을 흐른다.

 

쓸쓸, 쓸쓸, 쓸쓸, 쓸쓸

너와 나와 바람에게서 울려오는 가을의 의성어다.

 

월간 『시와 표현』 2016년 11월호 발표

 

 


 

구석본 시인

경북 칠곡에서 출생. 영남대학교 문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1975년 《시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지상의 그리운 섬』, 『노을 앞에 서면 땅끝이 보인다』, 『쓸쓸함에 관해서』,『추억론』 등이 있음. 1985년 대한민국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