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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일 시인 / 피:다
화분의 장미가 분홍을 피우고 있다.
분홍은 분홍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피고 있다. 분홍은 화분의 속삭임이 무언지 모르고 피고 있다.
분홍을 분홍이라고 말해야 분홍이듯 내 언어의 폭력성으로 피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개인적인 일이다.
분홍이 장미의 근거가 될 수 있어, 생각하는 내가 있다. 그 무엇도 분홍으로 피우기는 힘들어, 말하는 네가 있다.
분홍의 눈부신 소란과 침묵이 번갈아 피고 있다. 몸을 찢어 겹을 이루는 분홍을
창문 안쪽에서 내가 보고 있다. 창문 바깥쪽에서 네가 보고 있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분홍은 분홍이 무언지 모르고 피우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식물의, 식물성 기억으로 골똘하게
피우다와 피다 사이에 있는 흔한 장미화분은 누가 봐도 그저 장미화분일 뿐인데 놀라울 일이 아닌데
나는 분홍의 질서에 놀라고 있다.
웹진 『시인광장』 2018년 11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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