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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순 시인 / 사춘기 나무
한 그루 사람을 받았습니다. 날마다 때마다 젖을 물렸습니다. 무럭무럭 자라 애인이 되었습니다.
바람이 불면 바람 쪽으로 고개를 드는 사춘기 나무가 되었습니다. 얼굴이 붉어지고 거짓말이 자라는 비밀의 협곡에 갇혔습니다.
나무의 왼쪽은 사막으로 향합니다. 가엾은 맨발을 보여줍니다. 태양은 혼자 뜨거워서 나무를 돌볼 여력이 없습니다. 다른 나무들은 푸른 산 쪽으로 도망갑니다.
흔들리는 줄기가 자라 바람의 노래를 만들 거라고 누군가 예언합니다만 나는 늙어가는 팔을 뻗어 나무의 뿌리를 힘껏 감쌉니다. 많은 구름이 몰려와 구경합니다.
비바람이 세찬 날은 더 위험합니다. 나무 지지대도 흔들립니다. 나는 자장가나 진혼곡을 불러줍니다. 지나가는 소문들은 입이 백 개입니다.
햇살이 가루처럼 내리는 날 나무가 스스로 눈을 뜨고 세상을 빛내는 그늘을 소명처럼 내어줄 지도 모릅니다만 소문은 톱니가 달린 손을 보이며 지나갑니다.
그래도 나무는 나의 한 그루 애인입니다. 나는 그를 등질 수 없는 대지입니다.
계간 『다층』 2018년 가을호 발표
강순 시인 / 곶감이라는 숭고한 대상
설익은 기억을 허공에 내놓자 바람이 하루 종일 슬픔의 두께를 잰다.
푸른 과거로 도망치는 일은 나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나의 운명은 천여 톤의 붉은 질문들 바람에게 슬픔의 두께를 내어놓는 일, 오로지 망각이다.
배고픈 바람이 슬픔을 다독여 슬픔을 먹고 슬픔으로 배부르는 일
망각은 버거운 사치여서 밤마다 어지러운 환상 먼 곳 슬로바키아에서 달빛이 몰려온다.
당신에게 달콤한 유혹을 헌사하기 위해 지젝*처럼 난해한 까마귀가 운다.
작은 슬픔의 편린조차 잊는 일 모든 망각에는 희망의 꽃씨가 들어 있어 상처 자리 쓰다듬은 지 백 번 천 번 부끄러운 맨살 위 붉은꽃, 검은꽃, 흰꽃 피어난다.
혼자 울던 문장들, 만 번째, 새로운 해답이다.
내 몸은 꽃들의 은밀한 색감을 훔쳤나 새로 태어난 나를 자꾸 훔쳐보는 당신, 이제 달콤한 나를 유혹해도 당신은 무죄 슬픔을 모두 망각했으니 나의 과거도 무죄
*슬라보예 지젝: 슬로바키아 출신 철학자
계간『시와 사람』 2018년 봄호 발표
강순 시인 / 아픈 의자
내가 얼굴이 있었던가요 눈을 감아도 하늘이 보여요 내 안의 내가 너무 작아 다리가 아파요
쓸모없는 기억만 가득 차서 허리가 구부정해요 새들이 작은 나를 비웃으며 날아가요 바람이 낡은 나를 버리고 떠나가요
담벼락이 나에 대해 아는 건 내 몽상에는 숲이 하나 있고 숲에는 착한 요정이 웃고 있고 요정은 튼실한 나무집에 살고 그 집 안에 나의 근육이 살아있다는 것
나는 실종되고 편집되다가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홀로 우주의 왼편을 살짝 흔들어 담벼락에 푸른 그림자를 흘릴 거래요 그리하여 새벽녘 당신의 눈길에 닿을 거래요
아직도 꿈이 넘쳐 다리가 아파요 질문을 덜 하고 침묵을 더 해도 별은 너무 멀어요 여전히 등이 아파 하늘을 모두 버렸어요 젊고 강한 내가 되려고 새들과 바람을 도로 불렀어요
그러니 눈을 뜰 얼굴을 달아줘요 물어뜯을 엄마라도 낳아줘요 당신 있는 곳 주소를 보내 줘요 당신 가슴 속에도 근육이 있잖아요
계간 『다층』 2018년 가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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