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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영숙 시인 / 수건의 고독사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18.

이영숙 시인 / 수건의 고독사

 

 

수건이 수생식물에서 진화하여 공중식물이 되었다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틸란드시아*나 디시디아**가 수건의 일종이듯

심지어 박쥐란***이 잔털로 수건의 돌기를 연기하듯

연사, 무연사, 죽사, 코마사, 극세사는 식물의 조직에 대한 분류 명세다

습기 많은 날 수건이 눅눅해지는 건 이제 곧 잎을 뻗고 뿌리를 공중에 늘어뜨릴 때가 되었다는 신호다

 

물기라면 사족을 못 쓰고 수건이 덤비는 건 저 물 밑바닥에 뿌리를 박고 물결에 일렁이던 추억 때문

누가 수건의 전생을 형상화 했는지

쓰다듬는 대로 돌기는 이리 저리 일렁인다

 

하고많은 집 중에 물기도 온기도 곡기도 끊긴 집

미라가 뭔가 물기 고스란히 빠진 신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차마 시취를 빨아들이지는 못하고 눈물도 없이

마지막으로 빨아 널린 자세로 잎도 뿌리도 내리지 못한 채

방을 가로지른 줄에서 자기가 공중식물이란 사실만 다시 한 번 입증한 채

 

*ㆍ**ㆍ*** 흙도 필요 없이 공중의 습기만으로 생장가능한 공중식물의 일종

 

시집 『히스테리 미스터리』(실천문학사, 2019) 중에서

 

 


 

 

이영숙 시인 / 히스테리 미스터리

 

 

잠을 자야 살지, 백야가 따라와 삼 년째 동거 중이다 그늘 한 점 주름 한 줄 없는 06시 10분에서 40분 사이 검은 비키니 금발머리가 허구한 날 자맥질에 배영(背泳)질이고 게서 십여 분 거리 해변에선 스패니얼 계의 죽은 개 한 마리에 파리가 떼로 들고 난다 영문도 모른 채 닳고 닳아 종잇장처럼 팔랑이는 필란드만(灣의) 여름

 

발레리노가 그녀를 허공에 띄웠을 때 내가 그의 손을 잡고 어둠을 벌컥 연다 스프링영양처럼 그녀가 공중을 딛고 있는 동안 타조 같은 나의 다리 몸통 부리가 퍽퍽 잘려나간다 빛의 숄을 두른 채 그의 능선을 밟고 사뿐히 내려서는 그녀 한번 날아보지도 못하고 나는 다시 객석에 갇혀

 

우리는 자연공부를 이렇게 하며 살아요 낡은 빌라 불개미가 줄지어 과자 부스러기를 물어 나른다 자신은 다른 종족인 양 바퀴벌레가 천정을 가로지른다 주인 같은 자들의 의기양양에 월세방을 내주고 다시

 

테렐지 마지막 밤의 캠프파이어 때 사라진 그녀는 차 두 대로 그 일대를 헤집은 일행들에게 구릉에서 붙잡혔다 없, 에, 돌아가지, 단, 숨, 끊어지, 욧!

 

분해서 말도 안 나오던, 늑대에게 헌정하려던 숨통을 달고 돌아온

 

나는 좀 헷갈려요 혼자 있을 때조차 사생활을 연기하니 말이죠 그러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어도 어느새 자신을 캐스팅하고 있지 않겠어요? 내 지갑에서 돈을 훔쳐 책갈피에 숨겨 놓으며 자동기술법으로 시침을 떼는

 

그녀가 누군지 누가 말해줄래요?

 

시집 『히스테리 미스터리』(실천문학사, 2019) 중에서

 

 


 

이영숙 시인

강원도 철원에서 출생. 1991년 《문학예술》을 통해 시 등단. 2017년 《시와 세계》를 통해 평론 등단. 서울예술대학을 졸업하고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시집으로 『詩와 호박씨』, 『히스테리 미스터리』가 있음. 현재 추계예술대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