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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배정숙 시인 / 호더스증후군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31.

배정숙 시인 / 호더스증후군

 

 

돌지 않는 행성에서 바람은 허공을 다스리지 못한다.

작년에 핀 안개꽃이 지금까지 자욱한 그곳은 불우함을 개의치 않는 나만의 제국

그 안의 꽃방이다.

 

벽은 놀랍도록 견고해서 쓸모없는 오후가 가두어지고 낮달 꼬챙이 하나가 박혀서 빠지지 않는다.

들어오지 못하는 달그림자는 소용이라는 단어와 오물이라는 아이러니 사이를 중재한다.

 

나비가 묻혀온 꽃가루에서 쏟아지는 것은 모두 나의 당신.

그리움의 커다란 무덤 속으로 빨려들어 가면 자동으로 출구가 닫히고

깨지지 않는 수정이 된다.

구르지 않는 돌이 된다.

녹지 않는 얼음이 된다.

 

낯설지 않은 거짓말로 하수구를 막아놓고 몽환 속의 당신을 소장하는 가치에 나의 모두를 건다.

그리고는 누구의 눈치도 살피지 않는 철통같은 나만의 우주를 만든다.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것은 희고 따뜻하여 그곳에 영원의 무게를 묶어놓았을 때 안쪽의 광채는 다름 아닌 붉은 광기

 

향기가 풍기는 방향이 오리무중일 때 지켜야만 되는 약속을 위해 별자리 하나에 잔존殘存을 지탱한지라

유일하게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는 방식인지라

귀 기울일 수 없는 다른 유혹은 모두 불경스러운 울음소리인 것.

 

빈 하늘을 두고서도 품으로만 파고드는 나이테처럼 다스려지지 않는 애물.

이물스럽지 않은 최초의 분신이라서 비로소 나는 그것들의 심장 안에서 안도의 숨을 몰아쉰다.

 

웹진 『시인광장』 2016년 4월호 발표

 


 

배정숙 시인

2010년 《시로 여는 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나머지 시간의 윤곽』(시로여는세상, 2012)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