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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오늘 시인 / 나비의 그늘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30.

오늘 시인 / 나비의 그늘

 

 

허공에 금을 그은 적도 없는데

어디서 날아와 팔뚝에 앉아 있는 걸까 나비, 나비야

 

거울을 향해 손 흔들면 거꾸로 출렁거리는 나비 한 마리 하룻밤, 소문 없는 뒷방에서 소리 없이 노랠 부르면 천정에 심어 놓은 피아노까지 부풀어 오르던 더듬이 한 쌍 습관이란 무서운 거라며 우수수 건반들 쏟아져 내릴 때 온몸으로 얼룩지던 나비의 그늘 아름다운 질식을 소곤거리며 목 언저리를 지나는 것마다 어쩜 그렇게도 푸른빛이었는지 텅 빈 그림자 속으로 날 수 있길 허락한다면 내 몸에 더 많은 나비가 날아들어도 괜찮을 텐데 번진 노래쯤이야 쓰윽 닦아 버릴 수도 있을 텐데 네가 내가 또 네가 뒤섞인 이 방이 좁지 않은 건 네가 내 속으로 들어와 자라고 있기 때문이라며 우습지, 코가 시큰거릴 때 파고드는

 

나야, 나비야

나비야, 나야

 

시집 『나비야, 나야』(천년의시작, 2017) 중에서

 

 


 

 

오늘 시인 / 둥근 나라의 앨리스

 

 

아이가 그린 노란 풍선이 하늘로 올라가기 전

 

생각이 빨라진다 도화지 위의 빨간 금붕어가 팔딱거리자 팔목이 수초가 되고 노란 산호 활짝 피어난다 엄마 무거운 것들이 필요해요 모두 둥둥 떠오르고 있어요 아빠를 닮은 조약돌 몇 개 넣고 단단한 지붕을 덮어야 할까 봐요 냉장고로 달려가 커다란 날개를 그리자 동화책 속의 꼬마 도깨비들이 푸른 크레파스를 들고 뛰쳐나온다

 

엄마 입에서, 꽃이 피면 좋겠어요 아빠 빈 주머니 속엔 금화를 가득 그려 놓고 눈동자 속 젖은 해님을 꺼내 지붕에 걸어 놓을게요 내가 좋아하는 귀가 큰 금붕어와 빨간 꽃들은 엄마 가슴에 숨겨둘래요 엄마! 우리 집에서 나비들이 날아올라요 아픈 엄마에게 둥근 나라를 들려주고 싶어요

 

아이는 검정색을 쥐고 남김없이 칠한다 순간, 꽃들은 웃음을 멈췄고 미처 도망가지 못한 금붕어와 나비들이 잡혔다

 

엄마 놀라지 마요

저 웃음들을 몽땅 검은 비닐봉지에 담는 중이에요

웃지 않는 엄마 입에 붙이려고

 

시집 『나비야, 나야』(천년의시작, 2017) 중에서

 

 


 

오늘 시인

계간 《서시》  2006년 가을호에 〈안경을 싣고 걷다〉 외 4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나비야, 나야』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