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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다인 시인 / 무반주 퀼트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30.

정다인 시인 / 무반주 퀼트

 

 

차갑고 따뜻하고 서늘하고 추운

바늘도 없이, 아무런 화음도 없이 기운 나의 껍질들

봄여름가을겨울

 

 

1

 

멍은 안에서도 밖에서도 먼 내륙이다

무릎의 안쪽처럼

 

자줏빛 멍이 번진다

그건 너의 자화상,

부딪히지 않아도 꽃이 피듯 너는 온다

 

내 몸은 네가 돌아나간 우기였다

한 시절 붉게 흐드러졌던

나비의 문양들이 내 몸에 돋아나면 열병을 앓듯 운다

 

안에서 단단히 걸어 잠근 문을 두드리듯

뿌리의 말로

잎의 말로 번져나가는 처연한 번창, 궁핍한 복화술로

꽃이 진다

 

나를 수천의 스펙트럼으로 물들이는 너라는 염료

 

앞당겨온 후생처럼 생경한 빛깔로 내 몸 여기저기

노을이 번진다

 

안부를 물어오는 구름을 업은

저물녘 화첩 속의 붉디붉은 나는

 

2

 

입을 둥글게 모아 그늘을 천천히 밀어내는 호흡, 그건

어쩌면 내 안의 초록을 긴 토막으로 잘라내는 일

휘파람을 분다

 

풀숲의 뱀이 똬리를 한 번 푸는 동안 나는 서늘한

고백을 불러낸다

바람을 머금은 채 일렁이고 있는 나무처럼

기억이 기억을 쓰다듬는 시간

 

꼬리도 없이 잠적해버린 것을 일으키는 날,

하오는 길어지고 둥글게 모은 입술에서

잊혀진 한때가 흘러나온다

 

아직도, 라는 긴 칼처럼 숨을 잘라내는

여백 많은 말 속에

휘파람을 매달아 두는 날이 있다

 

마른장마의 대기 속으로 얇게 저민 바람을 타고

수천 갈래로 흩어지는 나,

 

둥글게 입을 모아 꼬리가 긴 뱀을 놓아기르면

 

3

 

상처의 딱지는

북쪽을 향해 날아가는 새의 부리처럼 검어진 고집,

있을 것 같지 않은 먼 곳을 향해

날개를 퍼덕이는 마음이었을까 딱지 속은 아직도 충혈된 채

끓고 있다 그런 건 가엾다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폐옥(廢屋)처럼 하나씩 하루씩

억지로 눈을 감기는 거니까

 

떼 지어 날아가는 새의 발은 흉터라고

딱지를 뜯으며 생각한다

 

상처가 골똘히 말라가는 동안 진흙이 묻은 날개를

탁탁 터는 새가 공중에서 아물어간다

검어진 부리로

끝나지 않는 여정을 물고 기어이 가야 하는

또 한 무리, 수천의 나는

 

4

 

창백하게 돋은 소름을 손바닥으로 쓸어본다

그 속에 눈이 쌓이고 있다

알몸으로 누워 있는 날이 있다

쓸쓸하다는 말 대신 수척한 북쪽으로 돌아누우면

유리창엔 하얗게 성에가 피어났다

 

누구의 무늬인지 알 수 없는

성에의 머뭇거리는 선과 동그라미를 이으면

어디에 닿을까

 

나와 머리를 나란히 한 채 혼자 누워 있을 수천의 나

 

배꼽 위에

눈사람을 올려주고 싶다 춥다는 건 녹아가는 일이라고

입김이 사라지기 전에 다 녹아버리는 거라고

 

가슴과 배와 팔다리가 달린 초라하고 가여운 눈사람

 

눈 위에 눈이 쌓여 견고해지는 계절

흥건하게 녹은 내가, 고여 있어

 

5

 

배경도 없이 홀로 연주되는 차갑고 따뜻하고

서늘하고 추운 누비 조각들

 

월간 『현대시』 2015년 11월호 발표

 

 


 

 

정다인 시인 / 분다

 

 

당신의 뒷모습은 바람의 탁본이다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역류의 시발점, 바람이 분다 신탁도 없이 웃자란 생의 비의를 끌어안고 당신이 쓸쓸하게 웃을 때 후우, 바람이 분다

 

미처 여미지 못한 옷깃에서, 헝클어져 엉킨 머릿결에서 숨결보다 얕은 바람이 인다 당신이라는 말, 불러 세울 수 없는 먼지처럼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순간들이 모여 세상은 더 낯선 곳으로 흘러간다 당신과 나의 서먹한 저녁이 수저 소리도 없이 어두워지면 길 위에선 또 다른 당신이 바지춤을 추스른다 스쳐 가는 뒷모습은 겹쳐지고 또 겹쳐져 문풍지처럼 떨리고, 당신은 그을음처럼 가라앉는다

 

한때 불꽃을 가졌으므로 당신과 나는 생살을 주고받은 사이, 널름거리던 화염 속에서 우리의 뒷모습은 뜨거웠을까 바람이 생을 일으키던 시절이 있었다 불쏘시개로 사라져버린, 피가 당기는 당신을 찾아 나는 바람을 거스른다

 

바람이 분다 당신에게서 내게로 내게서 당신에게로

 

헹궈낼 수 없는 얼굴을 들고 먼 곳을 향하는 당신은 회색의 얼굴로 날리듯 사라진다

 

손을 뻗으면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저녁의 검은 등판 위에 찍히는 바람의 몸, 바람의 말, 바람의 텅 빈 동공들

 

계간 『시로 여는 세상』 2015년 가을호 발표

 

 


 

정다인 시인

2015년 《시사사》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여자 k』(한국문연, 2017)이 있음. 웹진 『시인광장』 편집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