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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민 시인 / 정전
* 태생 맹인 소녀에게 활짝 핀 칸나를 보여주려고
꽃잎들의 합선 누브지 위의 요철들 손끝으로 짚어 읽는 칸나
너의 붉은 칸나를 나도 볼 수 있을까.
의자 딛고 올라서 신발장 뒤편 두꺼비집 스위치 더듬거리다. 밝은 계산에 관한 과부하를 생각한다.
암흑은 보는 자들의 눈에 만 보여
* “빨강, 하면 무엇이 떠오르니” “빨강색, 하면 피가 생각나요 그래서 무서워요” “피가 빨강색이란 건 어떻게 알았니” “책에서 읽었어요”
* 점판 속에 있는 여섯 개의 점을 찍어 글을 쓴다. 나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고 너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다.
많은 것을 볼수록 점점 더 초라해진다. 눈이 다 멀기 전에 가슴 속에 집어넣을 사물을 고른다.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고 어떤 욕망에도 더럽혀지지 않는 그것은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모습이어서 보여줄 수가 없다.
* 혼자만의 빨강이 갖고 싶었다. 크레용 중에 빨강이 제일 먼저 닳았다.
늦잠 자는 빨강 밥 같이 먹자 부르는 빨강 숙제는 다 했니 확인하는 빨강
다 보아서 더 이상 볼 게 없어서 눈이 멀었다.
월광 소나타가 초연되던 밤. 방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모두 울었다고 알려준 것도 바로 빨강이었다.
너의 빨강
부재를 대신해준 빨강의 안주머니
빨강의 머리카락 빨강의 우편봉투 빨강의 동전지갑 빨강의 샤프펜슬 빨강의 사과쥬스
여기에도 저기에도 거기에도 빨강이 있다. 여기에도 저기에도 거기에도 빨강이 없다.
‘도대체 어쩌란 말이야’ 있어서 없는 빨강이 없어서 있는 빨강에게 눈을 흘긴다.
까마귀의 눈물 잃어버린 만년필 아침 없는 심해 아귀의 입술에서 발광하는 촉수가 감지해낸 미세한 빨강 바나나에 꼭꼭 숨어있는 빨강 열 개의 발가락이 징그러운 빨강
* ‘얘야, 사랑한다는 말을 믿어선 안 된단다. 지나가버린 지금 여기, 짧거나 긴 이야기는 똑 같은 줄거리로 요약 된단다 ‘
깔대기 모양의 지옥도를 설명하는 불문학 교수의 머리카락 오전 오후 같이 짝이 없는 빨강
죽음 연습 구름 연습 말풍선 연습
늘어진 전선에 거꾸로 매달려있는 까마귀 정수리의 검은 피 밀알을 향해 날아오는 붉은 까마귀들 빨강은 훌륭한 사냥감 어느 날 문득 첨탑에 앉아있는 빨강은 까마귀처럼 운다.
나를 이야기 하려고 머뭇거리는 빨강, 빨강은 흰 샌들을 신고 다닌다.
순순히 어둠의 문턱을 넘지 않겠다는 빨강 아무 일에나 슬퍼하는 나쁜 습관은 예쁜 꽃장식이 놓인 젤리처럼 말랑말랑하다.
* 햇빛의 포옹
외로이/ 친구들도 없이/ 혼자 /교실에 남겨져 있는/ 소녀/ 그런 소녀의/ 외로운/ 한 줄기 밝게 빛나는/ 손이 잡아준다 /그 애가/ 어디에 가든 따라오고 /심심해하면 안아주는/ 맑게 빛나는 /또 하나의 친구 /말도 할 수 없고 /들을 수도 없지만 /빛으로/ 그 소녀와 이야기 한다.
오래된 항아리가 커튼 뒤에 숨어있어도 보였다.
어느 쪽으로 기울어질까. 천개의 음으로 이루어진 빨강 다 먹지 않고 남겨둔 빨강에서 딸기향이 난다.
* 물고기를 키우지 않는 수조를 위해 수리공을 부르는 빨강 기다릴 때, 기다릴 것이 없는 빨강
단순한 수줍은 과묵한 너의 두 눈에서 시작된 빨강 눈이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가. -<밤의 역사> 보르헤스
* 보아서 다 보아서 더 이상 볼 게 없어서 태어날 때부터 아무 것도 보지 않기로 한 너에게 활짝 핀 칸나를 보여주려고
웹진 『시인광장』 2018년 11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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