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성훈 시인 / 지퍼의 뼈
수동식 입은 닫힐 때 마다 생각한다 내가 말할 틈도 없이 네가 열리는지도 몰라 여백에 갇혀 있다 맥없이 풀어지는 은밀한 기호의 숨결을 머금고 양 방향으로 길들여진 행간과 행간 사이 숨겨진 꽃술 붉은 혀가 기어 나온다 사방으로 연결된 행간의 혈관을 핥아봐 견고한 문장은 표피를 걷어내고 욕망의 내장을 느린 속도로 보여주잖아 서로 반대 방향으로 닫혀있는 촉수를 밀고 당겨 이제 날 허물어지는 문맥에서 찾아 너의 오감으로 뜸드는 육감을 적셔봐 스스로 열지 못하는 문자의 혓바늘로 자음과 모음이 맞물려 있는 압축된 가슴을 풀고 수백 개의 뼈로 관절 마디마디를 꺾어봐 이제 네가 들어올 깊은 바닷길이 열린다 가벼운 비명소리로 나를 열고나면 등골 빠진 몸은 버리는 거야.
2010년 「열린시학상」 수상시
권성훈 시인 / 유씨 목공소
자음과 모음에 톱질을 시작 했어 비명이 새어 나가지 않게 욕조에 1492 콜럼부스를 틀어놓고 등단해 ㄱ자로 ㄴㄷㄹ ㅁㅂ ㅅ 목젖에서 꿈틀거리는 ㅇㅈ ㅊㅋ 혀를 막고 ㅌ ㅍ ㅎ 닿소리를 열네 토막 내는 거야 저항하다 둔기 맞은 자음의 입 안에 고여 있던 구절이 흘러나와 바닥에 닿으면 한꺼번에 잘려나간 모음의 내장이 터질 것 같아 ㅏㅑ하며 눈물짓는 받침을 ㅓㅕ 떼어낸 실밥 풀린 홀소리가 엎치락뒤치락 ㅗ ㅛ것 봐 언어의 살갗에 붙어 있다 켜켜이 떨어지는 나뭇잎의 잔말들 자꾸 의문을 던지는 것 같아 지워진 기억조차 차례로 지워야 했어 나이테의 ㅜ ㅠ 빛깔만 그루터기로 남을 때 까지 연쇄로 쏟아지는 풍문을 대패질 하는 거야 어제 파 묻혔던 새벽이 삐걱 문을 열고 들어와 동강 난 음절로 절절하게 이슬 맺힌 어둠 헐렁해진 마지막* 가는, 문신을 ㅡ ㅣ새겨 넣을 줄이야 얼굴 없는 어근을 못질하는 유씨의 목공소에 관절 빠진 몸시(肉詩) 한 그루 널브러져 있다지.
* 연쇄살인범 유영철의 시 제목
계간 『다층』 2011년 여름호 발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신영배 시인 / 사물의 방 (0) | 2019.06.05 |
|---|---|
| 김지요 시인 / 비행(非行), 혹은 飛行 외 1편 (0) | 2019.06.04 |
| 김진돈 시인 / 시간의 그물 외 1편 (0) | 2019.06.04 |
| 오현정 시인 / 숲이 낳은 숨 외 4편 (0) | 2019.06.04 |
| 김신용 시인 / 滴―파베르제의 달걀 외 2편 (0) | 2019.06.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