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현정 시인 / 숲이 낳은 숨
맨몸을 비벼 만든 아이가 귀를 앓고 하염없이 울었다.
숲은 미어지는 눈물을 흙에 섞어 강아지나 토끼를 빚고 아이의 영혼 대신 구슬을 불길 속으로 던졌다.
더 이상의 슬픔은 숲을 지나 강으로 흘러갔다.
돌니베스토니체의 사람들도 배고픔이 해결되면 서로의 눈동자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았다.
두 개로 조각난 비너스의 몸은 피를 이어가는 또 한 몸
춤추며 환호하며 새해를 밝히는 빛이 나무속에 움트고 불씨를 마음속에 담아 생명을 일군 손길이 쉴 틈이 없었다.
화덕 주위에 모여 따뜻한 말을 나누며 고된 삶을 구워내는 사람들
전곡선사박물관 체코의 구석기시대 앞에서 응어리마저 녹였다.
저토록 새까만 울음 속에서 폭죽으로 터지는 숨소리를 듣기 위해 사람들은 이 순간에도 뜀박질하는 가슴속 숲길을 가꾸고 있다.
계간 『시현실』 2018년 봄호 발표
오현정 시인 / 가면극
또 다른 목록은 필요 없어 권태를 날려버릴 조말론 향수 빈 지갑을 채워줄 콜롬보 악어백 주름을 가려줄 쇼파드 선글라스 갖고 싶은 목록에 밑줄 긋다가 그 애들을 내 곁에 잡아다 앉혀놓고서야 미소를 지었다. 밤새 가슴골은 빈약해지고 사야 할 새 물건이 추가되었다.
한없이 젊어져야 하는 시간은 날 새면 뭔가 사고 만다. 손목시계는 붙잡아 맬수록 떨어져나가고 낡아간다.
에우리피데스 비극 소포클레스 비극 아이스퀼로스 비극 인생은 나날이 지루하여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에도 밑줄 긋다가 한 번 더 웃으려 두 번 밑줄 긋는다.
연필이 나무 향으로 어둔 밤을 깎으며 책장을 덮을 때 내 옆의 문방사우(文房四友)들도 함께 웃는다.
거울 속에서 숨어 사는 늙은 느티나무가 잠시 보이다 사라진다.
월간 『현대시학』 2016년 11월호 발표
오현정 시인 / 그에게서 탄 냄새가 났다
뜨거운 불길 속으로 주저 없이 뛰어드는 소방관이 되고 싶었다, 던 그는 불타는 울음이었다 산 너머 꿈이 산불로 그를 부를 때 불거진 목젖은 잔잔한 궤를 바람의 방향 쪽으로 거세게 몰고 갔다.
그는 톱과 도끼, 불을 붙이는 토치를 챙겨 산을 올랐다. 골칫덩어리 가족을 먹여 살리려면 사고가 생긴 반대방향으로 달려가 불씨를 베어버리고 요새를 파야만 했다.
주변의 나무들을 자르지 않아 화마가 통째로 그를 덮치자 그을음에 맞불을 놓아 산속에 숨어있는 뱀의 혓바닥마저 구워버렸다.
불같은 사고뭉치들이 그를 삼킬 듯 곤혹하게 할 때마다 불은 오히려 그에게 삶의 방어선이 되었다.
주체할 수 없는 정념에 싸인 불꽃은 건너편 강이 범람하자 더욱 미친 듯 타올랐다. 연기와 폭발음 뒤에야 재와 빗물로 얼룩진 탈출구가 희미하게 보였다.
순식간에 안전 막 속으로 대피하는 건 또 다른 사투와 희생을 위해 아우성을 뒤로 하고 스스로 경계선을 구축하는 일이었다.
여자가 잡고 있던 뼈만 남은 양산을 펼치자 탄 냄새에 그의 코끝이 찡했다. 숨통을 조이며 안고 나온 아기가 숨졌을 때 그는 다시는 사랑을 잃고 싶지 않았다.
탄 자국이 만연한 방화복과 그의 숨결을 나누어 준 소방 호스를 세척하고 산그늘에 누워 애환의 직업과 미래를 점쳐보았다.
희미한 낮달이 목숨 걸고 태양의 입 속으로 구름의 살을 떼어 넣었다. 누구를 위해 그 무엇을 해준다는 건 바로 나를 태우는 일이다.
계간 『애지』 2018년 여름호 발표
오현정 시인 / 우포늪
어부가 오기 전에 흠뻑 젖은 주매리 둘레길 땀방울이 새벽안개를 헤친다.
뿌리에서 솟는 양수를 빨아들이다 풀어놓던 갈대 눈 밝은 늪은 주체할 수 없이 들끓다 막 피어나는 들꽃을 껴안고 살아있는 모든 것은 어딘가 떠나기 위해 울부짖는다.
1억 4천만 년 전, 그 혼령들마저 고전의 체위로 아침을 여는 여기 원앙 한 쌍이 물 억새를 비켜 가는데 축 처진 내 왼쪽 어깨가 물길 위에서 수평이 된다.
이마배*도 뜨지 않는 은은한 허공만 늪 속으로 깊어지는 하늘과 땅이 하나 되어 뼈가 녹고 살이 녹는 물안개 그림자.
태고의 신비 속에 빠지다 밤새 몇 번인가 죽을 것 같던 해가 둥실 그물을 던진다.
* 대나무 장대로 밀고 가는 장대거룻배.
계간 『시인시대』 2016년 겨울호 발표
오현정 시인 / 알바트로스의 키스
골퍼들의 꿈 알바트로스 육백 미터 가량의 필드에서 단 두 번 만에 공을 홀 안으로 집어넣고 환호와 박수 속에 퍼붓는 연인의 키스세례 언제 받아보나. 선수는 그날을 위해 독수리보다 높이 애인을 띄워놓고 갈매기보다 우아한 자세로 공을 날린다. 긴 생각이 담긴 검은 털과 하얀 깃이 머리에서 뒷목까지
황금 깃털 심어다 주듯 바람 부는 날 휘어져 나는 공을 보면 신천옹(信天翁)의 비행솜씨 사라질까. 길고 좁은 날개로 날갯짓 않은 채, 수 시간 떠있는 현자(賢者), 알바트로스의 사색을 얼른 훔쳐오고 싶다. 꿈속의 봉황도 환상의 불사조도 아닌 필사의 기적은 하늘을 믿고 몸을 맡긴다. 한 자궁만 기억할 종족보존이 그토록 오랫동안 짝을 기다리는 바보갈매기 남태평양으로 밀려갔다. 다시 무코지마 섬으로 그들만의 목숨 건 활공(滑空)은 내가 꿈꾸는 홀인원이다.
어떻게 똑같이 생긴 그 많은 무리에서 자신만의 암컷을 찾아내는지 노란 부리로 따다닥 부딪치며 붉은 혀가 바쁘다.
계간 『착각의 시학』 2017년 여름호 발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권성훈 시인 / 지퍼의 뼈 외 1편 (0) | 2019.06.04 |
|---|---|
| 김진돈 시인 / 시간의 그물 외 1편 (0) | 2019.06.04 |
| 김신용 시인 / 滴―파베르제의 달걀 외 2편 (0) | 2019.06.04 |
| 이경임 시인 / 송이 같은 시를 쓸 수 있을까 (0) | 2019.06.04 |
| 조민 시인 / 픽션들* (0) | 2019.06.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