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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신용 시인 / 滴―파베르제의 달걀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4.

김신용 시인 / 滴―파베르제의 달걀

 

 

   황학동 벼룩시장을 걷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내 앞에 달걀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맥반석으로 구워 돌처럼 딱딱한

   거무스레한 빛깔의 달걀이었다. 그 달걀을 바구니에 담아

   시장의 오가는 사람들에게 팔고 다니는 나이 든 행상이었다.

   그의 손에서 불쑥 내밀어진 달걀 하나―,

   도금된 금속이 변색된 것 같은, 거무튀튀한 빛깔의 달걀 하나―.

   그것을 본 순간, 나는 파베르제의 달걀을 떠올렸다

   19세기 제정 러시아의 보물이었던 것,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을 위해 제작되었고, 황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의

   모노그램인 “A F"가 문스톤으로 수놓아져 있는―,

   한때 러시아 황실의 상징이었던―, 그것이 불쑥 떠올랐다.

   혹시 내게도 그런 행운이 찾아온 것일까? 러시아 혁명 이후

   사치와 향락으로 이루어진, 수많은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얼룩진

   그 역사의 몰락과 함께 사라져, 뉘 손인지 모르게 굴러다니다

   그것들 중 하나가 어느 날, 미국의 한 벼룩시장에 나타나 헐값에 팔렸다는―

   헐값에 팔려, 그 횡재의 꿈으로 뭍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는―,

   혹시 이것도 그 보물들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순간

   딱! 내 이마에 무엇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정신 차려, 이 친구야! 하듯―. 늙은 행상이

   멍청하게 생각에 빠진 내 이마에 계란껍질을 깨

   한번 먹어보라구, 아주 맛있어! 하듯 웃으며 내미는 것이었다

   번쩍 정신이 든 나 또한 멋쩍게 웃으며 내 이마에 부딪쳐

   껍질을 깬 계란을 우물우물 씹었다.

   거무튀튀하게 맥반석으로 구운, 계란 한 알―.

   그때, 내 이마를 때린 그것이, 혹시 파베르제의 달걀은 아니었을까?

   마치 멸실환*처럼 우리 곁에서 사라졌다가, 어느 날

   고물시장에 나타나 뭍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만든, 그 파베르제의 달걀―

 

   *<인류 진화의 잃어버린 고리>

 

월간『시인동네』 2018년 8월호 발표

 

 


 

 

김신용 시인 / 滴―비의 가시

 

 

   너는… 비가 병균 같다고 생각 안 해?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어?

   지난 날, 한 여자 아이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비 오는 날, 공원의 벤치에서였다. 몸속을 텅 비워버리는…

   살아 있기 위해 무수한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눈에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그런 바이러스와 같은 병균… 그러나

   여자 아이는 살풋 웃기만 했었다. 파리하고 야윈 미소였다

   너도… 비는… 하늘에서… 땅으로만 내린다고 믿고 있지?

   비는… 작은 빗방울이라도… 공중에서…아래로만 떨어진다고…

   그때, 내가 다시 그렇게 물었을 때, 여자 아이는 의아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었다. 비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지 어디로 내려요?

   비는… 높은 곳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 아니에요? 그때 그 말을 들은

   나는 한심한 듯 다시 이렇게 말해 주었었다. 아니야… 때론, 비는…

   그 사람의 몸속에서도 내려… 마치 허공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듯

   사람의 몸속에서도 내려…, 그리고 비는… 그 사람의 몸속에서

   돋아나기도 해… 마치 가시처럼… 찔리면 아프게 피를 흘리는

   날카로운 가시처럼…. 너는 이 공원의 벤치에서 비를 만났을 때

   오늘처럼… 이렇게 쓸쓸하게 비를 만났을 때

   그런 것을 느껴보지 못했어? 마치 가시가 돋아나듯

   가슴속에서 비가 돋아나는 것을 느껴보지 못했어?

   그러니까 너는… 가슴속에서 돋아 난… 그 비의 가시에 찔려

   아프게 피를 흘려 본 적은 없어? 고통으로 신음해 본 적은 없어?

 

   저기 봐―, 저기 한 여자 아이가 걸어오고 있다

   발걸음을 떼어놓을 때 마다 절룩이는, 한 여자 아이가 걸어오고 있다

 

   발밑의 제비꽃 하나 밟지 않으려고 기우뚱 비켜 걷는 것 같은…

 

   지난 날, 공원에서 남자를 만나면 ‘짜장면 한 그릇만 사 주실래요? 하던,

   불구의, 소아마비의 여자 아이가…

 

   오늘처럼 비 오는 날, 혼자 공원을 걷고 있노라면

   가슴속에서 비의 가시로 돋는, 한 여자 아이가….

 

계간 『포엠포엠』 2018년 봄호 발표

 

 


 

 

김신용 시인 / 滴―다시 쓰는, ‘자라’를 읽기 위한 세 개의 에스키스

 

 

   1

   저기, 둥글고 납작한 시선이

   바닥에

   떨어져 있다. 바닥을 수평으로 만들어 주는

   시선, 바닥의

   홍수에서 방주처럼 건져 줄

   시선.

 

   마치 세계의 무게를 겹겹이 껴입은 듯

   척추가 무거운 갑피로 변한 등짝에 짓눌린 채

 

   때로는 동굴의 벽화 같은 문양으로

   얼룩지면서도, 그것이

   슬픔의 무게가 아니라는 듯이

 

   자는 것과 자라는 것을 무슨 자웅동체처럼 지니고

 

   자라는 것과 자라라는 것 사이의, 그 동음이의어 속에서

 

   2

   저기, 0이 하나 떨어져 있네

   마치 커다란 호수가 떨어트린 물방울처럼

 

   그 0이 숫자 1을 꺼내듯 몸속에서 물갈퀴가 달린 네 개의 발을 꺼내지 않았다면

   파이프를 문 모자처럼, 목을 내밀지 않았다면

   아마 뒹굴어 다니는 돌처럼 보였을 것이네

   보잘 것 없는, 뭉툭한 돌멩이

 

   대체 자는 것인지

   자라는 것인지 모를, 자라는

 

   3

   자라는 참, 꼭 물의 눈 같다. 수면 아래 물의 눈꺼풀 속에 깊숙이 숨겨져 있다가

   고요한 때면 드러나는, 저 물의 눈망울

 

   저기, 자라가 물 위로 떠오른다. 저 물의 눈망울에 비치는 것이 선한 구름,

   바람 같은 얼굴들이였으면 좋겠다

 

계간 『포엠포엠』 2018년 봄호 발표

 

 


 

김신용 시인

1945년 부산에서 출생. 1988년 시  전문  무크지 《현대시사상》1집에 〈양동시편-뼉다귀집〉 외 6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버려진 사람들』(1988), 『개 같은 날들의 기록』(1990), 『몽유 속을 걷다』(1998), 『환상통』(2005), 『도장골 시편』 (2007),  『바자울에 기대다』(2011), 『잉어』(2013) 등과 장편소설『달은 어디에 있나 1,2』『기계 앵무새』 (1997), ‘『달은 어디에 있나 1. 2』 <고백을 이 제목으로 재출간> (2003), 『새를 아세요?』(2014)  등이 있음.  2005년 제7회 천상병문학상과 2006년 제6회 노작문학상,  2013년 제6회 웹진 『시인광장』 올해의좋은시상과 같은 해 고양행주문학상 수상. 현재 웹진 『시인광장』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