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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미영 시인 / 경계선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11.

이미영 시인 / 경계선

 

 

슬라임*을 만지면서부터 알약이 둘에서 하나로 줄었어요.

나는 면도날을 내려놓고 슬라임을 집어들어요. 이 안에 스펀지나 마시멜로를 넣을까요.

벚꽃 슬라임도 좋아요. 코끝이 꽃향기에 젖으면 기분도 덩달아 좋아지겠죠.

 

의사는 내 얼굴에서 어긋난 경계선이 보인대요. 난기류를 향해 내달릴 때면

엄마는 나에게 사생활을 다 맡겨두었대요.

도망가려는 엄마의 신발을 나는 제일 먼저 숨겨요.

 

먹지 않는 두부 속에 알약을 숨겨놓고 나는 또 슬라임을 주물러요.

한쪽 뇌가 발달하지 못해서 내 손 하나 안심을 못 시키네요.

조심하라고 백 번째 말하는 엄마는 내 뼈조차 흉기가 될 수 있대요.

 

슬라임 속에 나를 넣고, 뭉쳐요, 굴려요, 흐물흐물한 시간 속에

나는 슬라임이 되어요.

이름뿐인 사물들이 물렁한 나를 찌르고 쑤시는데

엄마는 지금 어디 있어요?

내 볼을 주물러줘요. 그러면 엄마의 젖가슴을 주무를 게요.

 

슬라임이 없는 날은 내 몸도 사라져요. 다시 면도날을 집어야 할까요.

내 병은 연필로 침대보에 구멍을 내요 피어싱을 하듯

혀에 바늘을 꽂으라고 해요. 그러면 불안의 체기가 사라진대요.

 

소화되지 못한 울분이 슬라임 속에서 끓어올라요.

터질 듯 말 듯, 찌르면 그곳이 바로 탈출구겠죠.

내 손에 쥐어줘요. 당신의 슬라임을

터지기 전에 면도날을 잡기 전에

아무래도 그렇게 터지기 전에

 

*슬라임slime: 변형이 가능한 액체 장난감

 

웹진 『시인광장』 2019년 3월호 발표

 

  


 

이미영 시인

서울에서 출생. 숙명여자대학교 졸업. 2019년 제8회 웹진 『시인광장』 신인상 등단. 중봉조헌문학상 우수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