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영 시인 / 경계선
슬라임*을 만지면서부터 알약이 둘에서 하나로 줄었어요. 나는 면도날을 내려놓고 슬라임을 집어들어요. 이 안에 스펀지나 마시멜로를 넣을까요. 벚꽃 슬라임도 좋아요. 코끝이 꽃향기에 젖으면 기분도 덩달아 좋아지겠죠.
의사는 내 얼굴에서 어긋난 경계선이 보인대요. 난기류를 향해 내달릴 때면 엄마는 나에게 사생활을 다 맡겨두었대요. 도망가려는 엄마의 신발을 나는 제일 먼저 숨겨요.
먹지 않는 두부 속에 알약을 숨겨놓고 나는 또 슬라임을 주물러요. 한쪽 뇌가 발달하지 못해서 내 손 하나 안심을 못 시키네요. 조심하라고 백 번째 말하는 엄마는 내 뼈조차 흉기가 될 수 있대요.
슬라임 속에 나를 넣고, 뭉쳐요, 굴려요, 흐물흐물한 시간 속에 나는 슬라임이 되어요. 이름뿐인 사물들이 물렁한 나를 찌르고 쑤시는데 엄마는 지금 어디 있어요? 내 볼을 주물러줘요. 그러면 엄마의 젖가슴을 주무를 게요.
슬라임이 없는 날은 내 몸도 사라져요. 다시 면도날을 집어야 할까요. 내 병은 연필로 침대보에 구멍을 내요 피어싱을 하듯 혀에 바늘을 꽂으라고 해요. 그러면 불안의 체기가 사라진대요.
소화되지 못한 울분이 슬라임 속에서 끓어올라요. 터질 듯 말 듯, 찌르면 그곳이 바로 탈출구겠죠. 내 손에 쥐어줘요. 당신의 슬라임을 터지기 전에 면도날을 잡기 전에 아무래도 그렇게 터지기 전에
*슬라임slime: 변형이 가능한 액체 장난감
웹진 『시인광장』 2019년 3월호 발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최춘희 시인 / 다시 봄이 와서 (0) | 2019.06.11 |
|---|---|
| 한지혜 시인 / 시가 존이라는 생각이 들 때 (0) | 2019.06.11 |
| 박홍 시인 / 기억의 저편 외 1편 (0) | 2019.06.10 |
| 박만진 시인 / 중부지방 한때 소나기 외 1편 (0) | 2019.06.10 |
| 지하선 시인 / 매미가 뜨겁게 우는 이유 외 1편 (0) | 2019.0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