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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홍 시인 / 기억의 저편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10.

박홍 시인 / 기억의 저편

 

 

  장남감도 먹을 것도 없는 집이다

  수군, 수군거리다가 내가 바라보면 얼른 수군거림을 멈추는 집기들

  그리고 시침을 뚝 떼고 있는 고요

 

  기웃기웃 대문 틈으로 남의 집 마당을 기웃거리며 간다

  닭 벼슬처럼 붉은 꽃이 보인다

  새벽처럼 푸른 색을 둥글게 둥글게 매단 꽃도 있다

  알록달록 색색으로 키 자랑하는 꽃들

  붉은 혀를 빼문 듯 길게 늘어진 꽃잎

  길게 땅을 기어가는 초록

 

  다시 집에 돌아온다

  밤 새 쿵쾅거리며 지붕 위를 뛰어다니던 도깨비는

  빗자루로 변해 기둥에 비스듬히 기대고 있다

  마당 가 변소 문이 휑하게 열려 있다

  컴컴한 변소귀신이 컴컴한 변소 안에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나를 잡아당긴다

  마당 귀신은 지개 작대기로 변해서 돼지우리 옆에 삐딱하게 서 있다

  도망치듯 집을 빠져 나온다

 

  꽃을 찾아다니면서

  꿈속에서도 꽃을 찾아다니며 곤충처럼 살면서도

  나는 내가 곤충처럼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머리가 희끗거리는 무신론자로 변한 내가 잠을 자다가

  변소귀신이 발목을 잡아당기는 꿈이나 꾸면서

  악, 악 하고 악을 쓰다 깬다

  지붕 위를 뛰어다니는 도깨비를 피해 바람 타고 달아나다 깬다

 

  잠을 깨고는 나를 들여다 본다

  꽃들이 시로 변하고 있다

 

월간 『시와 표현』 2016년 3월호 발표

 

 


 

 

박홍 시인 / 엄마, 소비를 잘해야 잘 사는 세상이야

 

 

치약을 꾹꾹 눌러 쓰다가 치약이 나오지 않자 딸아이는 그냥 쓰레기통에 던져버린다. 나는 갑자기 똥이 마렵다. 쓰레기통에서 치약을 발견한 아내는 숟가락으로 살살 밀어 올려서 클립으로 콕 집어 놓는다. 나는 또 오줌이 마렵다. 딸아이는 못마땅해 하면서도 클립으로 집어놓은 치약을 쓰고 버린다. 그러면 아내는 쪼글쪼글해진 치약을 가져 와서 다시 대가리 부분을 칼로 자르고 쪼글쪼글해진 세상을 구석구석까지 발라 칫솔질을 한다. “엄마! 치약 공장사람들 다 굶어죽어. 그러지 마!” 딸아이가 소리친다.

 

포기김치를 꺼낸 딸아이가 뿌리부분을 툭 잘라 비닐 봉투에 버린다. 그걸 본 아내는 기겁을 하고 버린 뿌리를 잘게 썰어 상위에 올린다. 딸아이가 쪼글쪼글해진 세상을 투덜거린다.

 

칫솔 끝이 뭉개지면 아이는 버린다. 양말에 구멍이 생기면 아이는 버린다. 새로운 것이 보이면 아이는 금방 새로운 것으로 바꾼다. 옷도 신발도 휴대폰도. 그렇게 물건을 버리고 소비해주어야 아이는 삶이 가벼워진다고 말한다. 그래야 지금을 살아가는 예의라고 말한다.

 

아내는 아끼지 않으면 지구가 망한다고 말한다.

지구가 아내와 딸 사이에서 기우뚱거린다. 내가 자꾸 무거워진다.

 

계간 『미래시학』 2016년 여름호 발표

 

 


 

박홍 시인

경희대 화학과 중퇴. 2010년 《시안》으로 등단.​ 시집으로 『나의 옥상 와이너리』(시와표현, 2015)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