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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신애 시인 / 파내온 나무 그림자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10.

강신애 시인 / 파내온 나무 그림자

 

 

  그 나무는 브니엘교회 입구

  가지밭 모퉁이에 서 있었다.

  먼 세상을 내다보는 자세로

  산책에서 돌아오는 어느 날 나는

  꽃삽으로 나무 그림자를 들어내기 시작했다.

  토막 난 그림자를 날라

  내 방에 장판처럼 드리웠다.

  어둔 물관으로 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쪼그려 앉아 나는

  습자지 같은 잎새에 혀를 대보거나 갈색 차를 마셨다.

  그림자는 조금씩 자라났다.

  가지밭 모퉁이 나무가 그러하듯

  제 나무가 그리울 땐

  시선을 옆구리 깊숙이 파묻거나

  바람도 없는데 나를 떨어뜨릴 듯

  가지를 흔들어대기도 했다.

  길모퉁이 나무는 없어진 제 그림자를 탓하듯

  산책길의 내 어깨를 툭 쳤다.

  나는 가만히 다가가 그 나무 밑에 서본다.

  그러면 가느다란 가지를 활갯짓하며

  내 발치로 고속 촬영하듯 빠르게

  나무 그림자가 생겨났다.

  가로등 환한 밤, 우리는 이렇게 만나곤 했다.

 

 


 

 

강신애 시인 / 여행의 추억

 

 

  저 사과를 부수어 삼키던 입술은 어디로 갔나

 

  주루루 모래가 쏟아질 듯한 술병을 기울여

  한 잔의 술을 맛보았던가

 

  책을 펼쳐

  ‘기억은 깨진 제비꽃

  깨져 위 아래

  왼편 오른편으로 자라나는 종유석’

  이런 문장을 읽었던가?

 

  돌들의 중얼거림에 둘러싸여

  시간이 사람보다 빨리 늙어가는 이곳에

  다녀가긴 다녀갔던가

 

  그림자만 흔들흔들……

  숨결 박힌 화석과 줄넘기하고 있는

 

 


 

 

강신애 시인 / 최초의 性

 

 

  눈을 떴을 때

  까치와 거리 엔진소음이 들려왔다.

  천천히

  몸의 굴곡을 더듬어본다.

  부푼 젖

  그 아름다운 열매가 포실하게 안기고

  유연하게 허리께로 미끄러지는 손

  수줍은 물봉선을 건드린다.

 

  칼과 불의 사다리를 타고

  죽음 끝

  사과 끼앗을

  항성 깊이 심어 넣은 지옥의 시간들

 

  호르몬이 호르몬을

  본질이 본질을 바꾸는 고통을

  신조차 알 수 없었으리.

 

  거울의 젖을 훔쳐먹고 연명하다가

  모순의 입술에 담겨 운반된

  그녀

 

  흩어진 소설책과

  고양이가 그려진 물 컵도 그대로

  갈라진 건 아무 것도 없다.

  제 속에서 쪼그리고 울던 여자를

  비로소 꺼내놓았을 뿐.

 

  초록과 먼지가 반복되는 세상

  침대에서

  불안한 아름다움 속으로

  발끝을 세우고 내려오는

  첫

  아침.

 

계간 『정인문학』 2006년 봄호(창간호) 발표

 

 


 

강신애 시인

1961년 경기도 강화에서 출생하여 1996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시 [오래된 서랍]등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 작했다. 시집으로 『서랍이  있는  두 겹의  방』(창작과비평사, 2002)이 있다. 현재 디지털문화예술아카데미 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