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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진은영 시인 / 죽은 마술사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3.

진은영 시인 / 죽은 마술사

 

 

죽은 마술사, 내 사랑 너는 붉은 철책의 발코니 무의미의 실내악.

나의 악보가 놀라서 내게서 도망쳤다.

너에 대한 사랑과 슬픔에 빠져 내 귀는 익사할 지경이 되었으니까.

소금을 진 당나귀를 걷어찼지.

눈 속에 잠든 네 입술의 동네 근처로

 

내 심장은 얼음 위 맨발처럼 추억 속을 뛰고 있고

모든 기쁨을 잠들게 하는 종소리가 어두운 언덕 위로 지나갔다.

저녁의 탁자.

알 수 없는 시구들이 파란 연필처럼 길게 드러눕는다.

단어 속의 기억을, 깜박이는 속눈썹을 흰 개미들이 갉아먹고 있다.

 

이봐, 슬픔의 좁쌀을 가득 채우라고

이제 내 인생은 구멍 난 주머니야.

 

계간 『창작과 비평』 2018년 가을호 발표

 

 


 

 

진은영 시인 / Agnus Dei, Samuel Barber

-내가 아는 한 노동운동가에게

 

 

밤이여, 너의 긴 팔에 몇 개의 못 구멍을 내라.

뿔피리처럼 맑은 눈을 떠라.

당신이 집을 떠나 공장에서 썼던 일기의 첫 줄은 명랑했을 거라 상상합니다.

 

진보라니, 언제나 그 말은 아득하게 들립니다.

꿈속에서 누군가와 알몸으로

사랑을 하고 빵을 나누는 일처럼

 

자면서 벌어진 입술로 새어나오는 잠꼬대 같은 진실들

그런 걸, 믿으라는 말인가

나는 오랫동안 묻곤 했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을 지우면서

당신은 스스로 답했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그러나 결코 욕심 부리지는 않았죠.

한낮이 아니라

별들이 아니라

용접기 불꽃이 만든

한 개의 반짝이는 구리 반지를

벽보 속에, 슬픔 속에, 한 노동자의 얼굴 속에 넣어뒀을 뿐)

 

당신은 확신했습니다.

나는 세상의 소금이다.

나는 약간의 소금, 나를 넣어주세요.

(그렇다고, 역사의 바다가 더 짜지지는 않을 테지만)

모든 것은 둥둥 떠오를 것입니다.

거짓은 생각만큼 무겁지 않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염도의 합법칙성이 아니라 소금 한 알

 

흰 깃털의 어둠 속에서

얼굴을 씻는 나무들

 

어쩌면, 높은 데서 딴 열매는

빛의 밤송이 같은 것, 배가 고프고 따갑습니다.

때때로 빈속에 삼킨 정직은 우리의 창자를 찢으며 내려갑니다.

 

나는 완벽한 사실의 평면, 혹은 고통이라고 믿는 벽에 뚫린

아주 작은, 단 하나의 구멍.

나는 그것을 통과해서 나갈 거니까.

앞으로

 

앞으로

 

마지막 순간에 당신은 중얼거렸습니다.

 

  ……

 

  ……

 

나는

그 순간에 덧붙일 정치철학적 논평은 준비하지 못 했습니다.

 

다만, 질문으로

다시 질문을 지우며

 

당신과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신념으로

신이 머물렀다 막 떠난 도시처럼

이곳이 아직 따듯한 것이라고

조용히, 당신처럼, 비유로 말하고 싶습니다.

 

계간 『창작과 비평』 2018년 가을호 발표

 

 


 

진은영 시인

1970년 대전에서 출생. 이화여대 철학과와 同 대학원 졸업.  2000년 계간 《문학과 사회》 봄호에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 외 3편을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지성사, 2003)과 『우리는 매일매일』(문학과지성사, 2008), 『훔쳐가는 노래』(창비 2012),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문학과지성사, 2017)와 그밖의 저서로는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2004), 『니체, 영원회귀로와 차이의 철학』(2007) 등의 철학하기와 관련한 저서 등이 있음. 2009년 제14회 김달진문학상 젊은 시인상, 2010년 제56회 현대문학상, 2013년 제15회 천상병 시문학상, 2013년 제21회 대산문학상 시부문 수상. 현재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문학 및 인문상담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