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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오태환 시인 / 뿔·4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2.

오태환 시인 / 뿔·4

 

 

어느 날 뚜벅뚜벅 길을 걷는데 누가 말을 붙여 왔다

 

내 언어가 짓는 집은 무덤 속에 부장(附葬)된 어둠이다 어둠 속의 아주 오래된 침묵이다 그 침묵이 고스란히 육탈하고 나서는, 무슨 긁힌 흔적같이 쬐끄맣다 뭔지 알 수 없으나 초개(草芥)처럼 맑고 물소리처럼 투명하다

 

내 언어는 흰 지초당초무늬로 물보라 서리는, 해변의 검은 벼랑마루에서 막 날개를 접는 해동청(海東靑)이다 푸른 눈매의 서슬에 납설(臘雪)이라도 섞어 치면 절경이다 캄캄하게 화려하다

 

내 언어가 벼루를 내어 먹으로 가는 것은 시문(詩文)도 경사(經史)도 아니다 그저 빗소리일 뿐이다 쇄골과 연필자국처럼 희미한 임파선 속으로, 으리으리 관상동맥과 가문 발톱 속으로, 선득선득한 허파와 전두엽 속으로 창호지 창문 안에 빗물 들이치듯 들이치며 들이치며 저 혼자 자욱한

 

내 언어는 세계의 가장 높고 추운 봉토(封土)를 향해 산악(山嶽)처럼 솟구쳐 오른다 노란 꽃잎 두어 장이 아슬아슬 머물다 기어이 떨어져 내린 허공기슭이여 그 황량하고 황량한 떨림 한 낱 남기지 않은 채, 드디어 아득하다

 

덜컥! 겁이 나서 나는 골목 안으로 몸을 숨겼다

 

계간 『시안』 2011년 가을호 발표

 

 


 

 

오태환 시인 / 섹스에 관한 참 건조한 은유, 또는 몸의 만다라(曼茶羅)

 

 

1.

 

섬 안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나는 그녀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

 

2.

 

그녀의 머리칼이 소스라치며 일렁였다 잠깐, 희붐하게 떨리는 한숨소리 나는 한손으로 귀밑머리를 헤치고 목덜미에 가문 입술을 문질렀다 연분홍 유두가 등잔불 심지같이 도두 커졌다 소슬소슬 소름 끼치며 물처럼 보드라운 젖가슴 먼지까지 등피의 먼지까지 푸른 연필까지 저물녘 어스름까지 죄다 허벅지뿐인 그녀의 방에서, 그녀의 허벅지를 흰 배처럼 밀면서도 그녀의 수평선을 향해 그녀의 홀수선을 온몸으로 밀면서도 밀면서도

내가 나를 다시, 들키고 싶다

 

3.

 

어떤 이가 말했다 그의 음경은 흑단(黑檀)의 藏經처럼 검고 화려하다 누리에 가득 차 있다 또한 허공처럼 예리해서 새벽 두시의 빗소리든 천산북로의 印朱빛 사막이든 하늬바람 하린 모가지든 버히지 못할 게 없다 다른 이가 말했다 그것의 지극함은 冷金紙에 쳐 올린 靑梅같이 소슬하고 어엿하니, 문득 맑은 文字가 무심히 般若에 이르렀다고 할 만하다

 

4.

 

바람이 분다

 

그때

내가 한 번 더 죽은 그곳

 

5.

 

시의 언어는 가능하면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문장은 자명해 보인다 그래야 언어가 간섭하는 이미지도 머릿속에서 더 분명한 윤곽으로 조직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교열에 걸리지 싶다 허술할 뿐만 아니라 거짓말이란 혐의가 짙다 시의 언어가 모호할 수밖에 없는 것은, 모호해야 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숙명적이다 그것은 내 몸속에 裝幀된 여자들이 모조리 모호하다는 사실만큼 숙명적이다

 

나는 들숨이 날숨을 누르듯이, 위의 꽃이 아래의 꽃을 누르듯이 그녀들의 겨드랑이 안으로 발뒤꿈치 안으로 흰 목덜미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 모호가 모호를 누르듯이 그녀들의 行間 안으로, 行間의 섬 안으로 울면서

 

월간 『현대시학』 2011년 10월호 발표

 

 


 

오태환 시인

1960년 서울에서 출생. 고려대 사범대 국어교육과와 同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84년 《조선일보》와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북한산』(청하, 1986)과 『별빛들을 쓰다』(황금알, 2005)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