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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임동확 시인 / 희망사진관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2.

임동확 시인 / 희망사진관

 

 -아직-아님으로서의 아님은 생성된 존재를 가로질러간다 (에른스트 블로흐)

 

 

  단지 그렇게 기억되고 있을 뿐

  결국 방향이 없는, 그리하여 종말이 없는, 단 한 번도 인화되지 않은 것들이 추억일까

  어느 정지된 순간에 대한 덧없는 집착이 희망의 정체였을까

  서울 출장길 늦은 귀가의 택시 속에서 만난 신안동 고갯길

  희망사진관의 입간판이 낯설다; 아니, 정확히 말해

  희망이란 낱말이 왠지 낡고 생소한 느낌이다

 

  그런데도 길거리로 향한 형광 불빛 속에 드러난 사진의 얼굴들은

  어찌하여 모두들 오래 행복한 표정들을 짓고 있는 것일까

  어찌하여 그 많은 잊고 싶은 것들 속에서도

  저처럼 끄덕없이 변치 않은 열망들로 살아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제 죽도록 미워할 사람도

  사랑할 사람마저도 없는 내게 지금 묻는다면,

  내가 짓뭉기고 외면해온 시간의 흔적들밖에 더 말할게 없다

  심지어 죽음마저도 뚫고 들어가지 못한 마음속으로

  여전히 아니라고 도리질치며 지나가는 매서운 북풍소리

  가장 가까운 것들조차 따스하게 대하지 못했던 불구의 시간들을 고백하고 싶어진다

 

  보라, 그러니 저 사진틀 속에 영원히 멈춰 있는 것들조차

  이미 존재했던 것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건 오히려 미처 드러나지 못한 요청이었을 뿐

 

  여전히 우릴 살아 불타게 하는 것들은

  저 스러질 듯 서 있는 현실의 희망사진관 너머

  아직 기억되거나 생각나지 않는 낯설음 속에

  모든 희망들이 추문이 된 바로 이 세월의 그리움 속에

  끝내 지워지지 않을 무모한 절정의 섬광들로 빛날 뿐

 

시집 『처음 사랑을 느꼈다』(솔, 1998) 발표 중에서

 

 


 

 

임동확 시인 / 저녁의 노래

 

 

  눈 감으면 날마다 반복되는 저녁이

  전혀 다른 저녁의 얼굴로 다가오리

  그 저녁이 깊어질수록 아주 단순해진 외로움만

  그만 꿈을 잊는 머리 위에 새벽별처럼 빛나고

  더러 용서받지 못할 열애의 날들도

  덧없이 숨죽인 강물처럼 흘러가리

  결코 제 것이 아닌,

  소유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것들이

  그래서 더욱 아름다워지리

  곧잘 검은 세월의 거울 깊숙이 출몰하던

  저 무거운 기억의 편린들마저도

  불현듯 여름 밤하늘의 천둥 번개처럼 번쩍이리

 

  아아, 그러나 유한한 너와 내가 어쩌다가

  온갖 부조리한 운명과 사나운 무한이 기다리는

  이 찬란한 고요와 함께 마주하고 있는가

  정녕 환하기에 더욱 놀랍고 두려운 사랑의 밤이여

 

  더 오래 견디기 힘들면 별빛 쏟아지는 강가로 나가

  네가 남기고 간 한 권의 책 같은 남빛 우산을 펴리

  그러면 비로소 맹목인 내 입술이며 그토록 사납게 뛰던 심장마저

  수줍은 흑암처럼 눈을 감고

  드디어 제 안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리

  눈 감을수록 더 생생한 침묵의 빛 속에서만 온전히 넌

  네 차지리.

 

시집 『나는 오래전에도 여기 있었다 』(실천문학사, 2005)중에서

 

 


 

임동확 시인

1959년 전남 광주에서 출생. 전남대 국문과 및 同 대학원 졸업. 서강대 국문과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 취득. 시집 『매장시편』으로 등단.  시집으로 『살아 있는 날들의 비망록』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