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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경용 시인 / 한국 현대 여성 시인 사(史) 100년, 100인보 연작시 3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3.

한경용 시인 / 한국 현대 여성 시인 사(史) 100년, 100인보 연작시 3

 ㅡ김일엽, 수덕사의 흰

 

 

스님 밤이 깊습니다. 이 밤이 깊은 만큼 물도 산도 여우의 울음도 깊어 가겠지요. 환희대를 지나다 보니 아직 등불이 켜져 조심조심 걸어갔습니다. 낮에는 '청춘을 불사르고 '*를 읽은 불자 여인이 왔었습니다. 저처럼 그 책을 읽은 예비 비구니로 보입니다. 사랑에 돌팔매를 맞은 탄실은 일본에서 풍찬노숙하고 혜석은 수덕여관에 와서 그림에 정진하는데 심덕은 사랑과 함께 현해탄으로 몸을 날렸다지요. 그렇다면 스님은 속세를 버리고 큰 스님이 되셨군요. 암울했던 시대, 앞서간 신여성들을 생각해 봅니다. 일엽(一葉)이란 필명은 춘원께서 스님의 아름다운 필체에 반해 지어준 이름이었다 하죠. 채공 준비를 하다 보면 바람에 흐느끼는 솔의 소리사, 허공에 스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촛불에 비친 법당의 그림자, 목탁 소리 이 밤에 소승의 심장을 앉히는군요.

 

스님의 유일한 아들이 찾아온 날, 어미라 부르지 마라. 차갑게 거절하시는 모습에, 행자의 쌀 씻는 소리 새들이 우는 소리에 함께 실려 나갔습니다. 108 번뇌 함께 묵언의 찰나, 어이 풍경소리도 멈추는지 모두가 불타의 뜻인지요. 일주문에서 서성이던 중년 신사분의 얼도 천년의 쇠북에 고여 울릴 것인지요. 고찰을 덮은 풍악은 곧 백설을 맞을 것이며 고요에 덥혀 있을 7층 석탑은 흰, 그냥 그 자리에서 녹히겠지요. ‘아이가 걸어간 눈길에 문명의 바퀴 굴리지 마라. ’시던 스님의 말씀, 소승은 선림(禪林)을 향해 걷고 있을 것입니다.

 

응산 합장

 

*김일엽 스님의 수필집 명

 

웹진 『시인광장』 2018년 10월호 발표

 

 


 

한경용 시인

2009년 시집 『잠시 앉은 오후』로 등단. 2010년 《시에》, 2014년 《현대시》로 작품 활동. 2014년 시집 『빈센트를 위한 만찬』 출간.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