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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제니 시인 / 고아의 말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2.

 이제니 시인 / 고아의 말

 

 

이 슬픔을 따라가면 고아의 해변

 

늙고 병들고 지친 마음이 내 얼굴을 오히려 더 젊어 보이게 합니다. 어둠 속에서 써내려간 글자들을 읽으려고 종이 위에 두 손을 올려놓고 종이의 질감을 만져보았습니다.

 

종이는 울고 있었습니다.

심장은 손가락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삼각형 사각형 오각형 아름다운 도형들이 마음을 어루만진다.

뾰족한 것들이 나를 위무한다. 삼각형의 넓이를 구하는 공식이 사각형의 넓이를 구하는 공식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반으로 나눠지는 것  

반의 반으로 나눠지는 것  

반의 반의 반으로 나눠지는 것  

 

결국 어미 없이 혼자 서 있는 말  

고아의 해변에서 고아의 말을 내뱉으며  

혼자 울면서, 울면서 혼자 달려가는 말

 

나에게 나를 보여주지 마세요.

거울과 거울과 거울 속에서

무엇을 바라봐야 할지 몰라 나는 달렸습니다.

 

먹이를 손수 구하고

담요와 네, 담요와

따뜻한 담요와 네, 따뜻한 담요와  

 

그 많은 손 중에서 어미의 손이 내게로 다가오기를  

내 손이 어미의 손에게로 가 닿기를

소용없는 말이 고아의 해변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발을 잃으면 손이 발이 됩니다.  

손을 잃으면 발이 손이 됩니다.

손발을 다 잃으면 손발 없는 것들의 그 깊은 고독에게로  

 

바다는 깊습니다.  

바다는 깊고 넓습니다.  

 

이곳은 혼자 태어나서 혼자 죽어가는 말이 다시 죽어가는 바다  

밀려갔다 밀려오는

 

다시 태어나는 말이 달립니다.  

빛나고 아름답게, 빛나고 아름답고 쓸쓸하게  

당신은 고아의 말의 그 단단한 등에 앉아 당신의 몸 위에 덧난 것들이 출렁출렁 흔들리는 진동을 듣고 있습니다.

 

당신은 넘실대고  

고아의 말과 한몸으로 넘실대고  

바다는, 고아의 해변은, 매 순간 다른 리듬으로 밀려갔다 밀려오고  

 

슬픔을 따라가면 슬픔의 끝이 나옵니다.  

슬픔의 끝을 따라가면 더 깊은 슬픔의 끝으로

 

달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바다의 물결이 더 큰 진폭으로 울고 있습니다.  

텅 빈 조개껍데기에서 소리 없는 말들이 흘러나옵니다.

 

이 말들을 따라가면 다시 고아의 해변으로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창비, 2010) 중에서

 

 


 

 

이제니 시인 / 나무 구름 바람

 

 

그곳은 멀지 않았다. 한낮인데도 별자리의 그림자가 수풀 여기저기를 검게 물들였다. 나무그늘은 그저 움직일 뿐이었다. 바람을 따라 흐르듯이, 구름을 따라 번지듯이.

 

굴러가는것, 기어가는 것,

엎드려 있는 것, 절룩이는 것,

헤매는 것들의 세계가 돌연 보였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심장의 흑점 한켠에.

 

고요속에서 작은 것들이 말하고 있었습니다.

 

너의 시간과 나의 시간은 다르다.

너의 색깔과 나의 색깔은 다르다.

 

환청과 색맹의 날들이 소리없이 흐를 때

 

녹색의 입구

끝없는 녹색의 입구

 

녹색의 내부의 내부의 내부가

녹색의 내부의 내부의 내부의 외부가

내부의 외부의 내부의 외부의 내부가 열기기 시작했습니다.

 

머리카락이 자라나듯이, 너의 암흑이, 너의 검정이, 너의 하양이, 흑백의 밝고도 어두운 광선이. 흑백은 깨어 있지 않았다. 흑백은 누구도 깨우지 않는다. 흑백은 그저 간신히 그 자신만을 깨울 수 있을 뿐이다.

 

물결은 어디에서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물결은 무한증식하는 액체의 메아리. 땅끝으로 밀려와서 하얗게 토해진 백지의 울음.

 

아무것도 조직하지 않을 것이며 아무것도 통제하지 않으리라. 매순간모양을 바꾸는 구름이 말했습니다. 바람은 조언하거나 참견하지 않는다. 바람은 아무것도 돕지 않는다. 의지없이, 의식없이, 그 모든 것들을 돕는다. 여기에서 저기로 꽃가루들이 날린다. 검은 비닐봉지가 날아간다.

 

나의 바람은 나무가 되는 것이었다.

 

세계는 물결치고 있었다.

어떤 마음이 어떤 마음에게로 흘러가고 있었다. 물결은 춤추는 자에게는 흔들리고, 분노하는 자에게는 흩어진다. 감정이 들끓는 것은 나무 밖의 일이다. 사건은 언제나 나무 밖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나무는 나무로만 서 있었다.

 

그늘이 짙어진다, 들판이 넓어진다.

 

마음이 넓어진 것 같다고 어제의 너는 말했습니다.

 

구름의 바람은 나무가 되는 것이었다. 나무의 바람은 구름이 되는 것이었다. 바람의 바람은 바람이 되는 것이었다. 나무의 구름이 바람이듯이.바람의 나무가 구름이듯이. 세계는 너의 마음속에서 작고 넓다. 녹색 그늘 아래에서는 더 작고 더 넓다.

 

나무의 구름은 바람 곁에서,

바람의 나무는 구름 아래에서,

구름의 바람이 나무를 스쳐지나간다.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창비, 2010) 중에서

 

 


 

이제니 시인

1972년 부산에서 출생. 200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부문에 〈페루〉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아마도 아프리카』(창비, 2010)가 있음.